[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3

“여러분이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마태 7,12)

▲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한스 멤링의 작품(1478년)
흔히 ‘황금률’이라 부르는 오늘 구절은 예수 어록(Q)에서 원수 사랑 부분에 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을 마태오는 복된 선언 마지막 부분으로 옮긴 것 같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구절은 마태오가 덧붙인 것 같다. 예수가 이미 한 말을 기억시키려는 의도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마태 5,17).

황금률은 공자의 논어와 인도에서도 보인다. 그리스에서도 헤르도트(Herodot) 이래 거의 모든 문학 유형에서 흔히 나타난다. 유다교에서 황금률은 널리 퍼지진 않았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유다교 문헌에서 간혹 등장한다. 황금률과 이웃 사랑을 연결한 것이 유다교적 특징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 19,18).

예수 시절 존경받던 랍비 힐렐은 모세오경의 요약으로 황금률을 언급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물론 토라를 황금률로 대체할 수는 없다. 황금률은 보통 긍정적 문장과 부정적 문장으로 나타난다. 힐렐의 부정적 표현과 마태오의 긍정적 표현에서 결정적 차이를 이끌어낼 필요는 없다. 황금률이 예수의 독특한 사상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남에게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던 분 같다. 예수는 남에게서 배우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발전시킨 분이다. 공자처럼 예수에게도 뚜렷한 스승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 예수의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에게 진정한 스승은 곧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볼 수 없는 오늘의 문장이 마태오 복음에서 왜 나타날까. 당한 만큼 보복한다는 전투수칙, 주고받는 합리적 행동원칙을 황금률이 표현했다고 보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내 행동이 이웃을 넘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행동의 규준이 되게 하라는 칸트의 언급으로도 조금 부족하다. 이웃 사랑과 연결한 유다교적 특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황금률의 문제는 루카 복음 6,32-34에서 드러난다. “여러분이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들도 그만큼 합니다.” 황금률 정도는 죄인들도 능히 한다는 지적이다. 악의 세력은 서로를 보호하는 데 능숙하다.

황금률은 원수에 대한 사랑(루카 6,31)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률은 보복(Talio) 원칙에서 멀지 않게 된다. 그것이 마태오가 결국 하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사상의 특징이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넘어서 원수 사랑에까지 진전시키는 예수다. 율법을 비판함으로써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함으로써 율법이 완성된다(갈라 5,14; 로마 13,8-10; 야고 2,8).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먼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은 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도 용서도 희생도 ‘내가 먼저’―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특징이다. 그런 힘이 어디서 올까. 바로 예수에게서 온다는 가르침이다. 예수에 집중하자. 그리스도교에 등장한 수많은 성인들과 신학자들을 보기에 앞서 먼저 예수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마리아, 성인, 어떤 신학자니 무슨 신학 흐름이니 언급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희생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정말 그렇게 하는가.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신교 목회자들은 사랑도 용서도 희생도 먼저 하는가. 남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설교하지만 자신들은 먼저 그렇게 하는가.

먼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부족하다. 누구나 먼저 자기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교회도 종교인들도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해 주려면 자신을 먼저 고쳐야 한다. 남에게 바라지 말고 남에게 해 주려면 더욱 그렇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고 예수가 말하는 대목은 예수가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바리사이는 모범적 신앙인으로, 율법학자는 뛰어난 성서학자로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존경받았다. 그들은 기도, 선행, 성서 공부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신앙인들이었다. 그런 그들보다 예수 제자들은 더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설교자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를 ‘위선자’라 칭하며 가볍게 무시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유다교를 비판해서 그리스도교가 향상되지는 않는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비판해서 자기 점수가 오르진 않는다.

그들의 신앙심과 성서 식견을 솔직히 나는 십분의 일도 따라갈 자신이 없다. 그들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예수는 비판한 것이다. 종교적 모범과 성서 식견에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면 예수에게 비판받는 것이다.

우리 시대 모범적 신앙인들과 성서학자들은 예수 시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크게 다른가. 그들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오늘 누구일까. 그들에게 향한 비난을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할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에서 우리 믿음의 진실 여부가 마침내 드러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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