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2

“7 간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그러면 얻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8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9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여러분 중에 누가 있습니까? 10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1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태 7,7-11)

▲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한스 멤링의 작품(1478년)
‘재산을 땅에 쌓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등 부정적 경고와 명령 뒤에 복된 선언에 대한 설명 끝 부분까지 긍정적 권고가 이어진다. ‘받을 것이다, 얻을 것이다, 열릴 것이다’라는 수동태 동사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을 나타낸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어떤 조건도 오늘의 단락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기도할 때 자기 영혼을 하느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유다교 스승(랍비)들은 가르쳤다. 기도하는 순간 하느님이 바로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라는 뜻이다. 나는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다.

간청하면 받는다는 것은 구걸하는 거지들의 논리다. 예수 시대에도 떠도는 거지들은 많았다. 구하고 찾는 것은 지혜문학에서 애용되는 표현이다(잠언 2,4; 마르 13,45).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것을 기도와 연결시켰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내게 기도하면, 나는 너희 말을 들어주리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나리라”(예레 29,12). ‘두드리고, 열리는’ 비유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마태 25,11; 루카 12,36; 묵시 3,20).

그러나 악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은 반기지 않는다. “귀를 막고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은 그 기도마저 역겨워 하신다”(잠언 28,9). 기도가 받아들여질 것이라 권고하는 임무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특히 예언자들의 몫이다. “네가 부르짖으면 하느님이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도움을 청하면 하느님은 말하실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이사 58,9).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로 옮겨진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의 비유라 여겨도 되겠다. 빵과 생선은 겟네사렛 호수(갈릴래아 호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주식이다. 빵과 돌, 생선과 뱀은 모양이 비슷하여 그런 비유가 쓰인 것 같다.

11절 “여러분은 악하면서도”라는 표현에서 이른바 성악설이나 구원예정설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칼빈과 바르트는 예정설을 주장했지만 예정설은 예수와 아무 관계없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류의 예정설도 교리(dogma)로 가르친 적이 없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진리라는 뜻의 도그마(dogma)는 억지 주장 등의 부정적인 뜻을 가리키는 단어로 흔히 잘못 사용되고 있다.

자녀를 학대하는 악한 아버지의 비유가 오늘의 단락에 보인다. 나쁜 어머니의 비유도 공동성서에 나타난다. 부모라고 어찌 다 같은 부모일까.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으리라”(이사 49,15).

부모가 자녀를 버려도 하느님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다. 부모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부모의 사랑을 보는 것이다. 인식론 순서는 부모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사랑 쪽으로 향하지만 판단 순서는 그 반대다. 그것이 신학적 순서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경험이 지식의 판단기준인 것은 아니다.

오늘의 단락은 하느님과의 거래 원칙에 대한 조언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획득하기 위한 요령을 가르치는 대목도,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장사 수완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부모보다 하느님을 더 믿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하느님께 마음 놓고 기도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기도하라는 말씀은 특히 오늘 사방에서 묵살되고 있다. 기도를 자본주의 논리로 악용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탓에 기도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다. 합리성을 최고 원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기도를 업신여기기도 한다. 기도를 주술적으로 과장하는 것도, 기도를 문맹적 행위로 비하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기도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도와준다. 올바른 기도가 참으로 드문 오늘이기에 기도는 더 소중하다.

예수 시대 유다인들은 주로 어떤 기도를 바쳤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기도에서 무엇을 간청했을까.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되게 해주십사 그들은 간청하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하였다.

다른 사람은, 다른 민족은 무엇을 기도하는지 우리는 가끔이라도 살펴보자. 우리 시대에 중요하고 시급한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성철 스님의 말이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역사의 희생자를 위한 기도는 더 아름답다. 예수의 삶 자체가 역사의 희생자를 위한 기도였다. 기도는 문장이 아니라 삶이다.

예수의 역사보다 예수의 말씀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그리스도교에 두드러진다. 그리스도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요약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예수의 역사는 말씀 못지않게 중요하다. 성서에서 말씀만 읽고 그 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성서를 반쪽으로 축소하는 격이다.

성서는 예수의 단순한 어록이 아니다. 이솝 이야기, 채근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부류의 책과 성서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성서에는 예수의 말씀 뿐 아니라 예수의 역사가 살아 숨 쉰다. 성서는 말씀보다는 역사가 우세한 책이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라기보다 역사종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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