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1]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그 저술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신 뒤에 여러 가지 증거로써 그들에게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사도 1,3)라고 말한다. 이 체험은 베드로의 첫 설교에도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나자렛 사람 예수를 권능과 기적과 표징으로 확인하셨습니다. …… 이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진통에서 풀어 주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이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2,22-24)

이 체험이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문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서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또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케파에게, 그 다음 열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코린 15,3-5)

▲ ‘그리스도의 무덤에 있는 세 명의 마리아’, 두초의 작품(1311년)

부활 체험에 대한 초기 증언은 매우 간결하다. 그 내용은 십자가에 죽은 분을 하느님이 부활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발현하였고, 제자들을 파견하여 온 세상에 그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부활 체험은 기적을 본 것이 아니었다. 부활하는 예수를 보았다는 증언은 복음서 어디에도 없다. 복음서들은 부활을 겪은 증인들이 놀라는 것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한다. 후대의 신약 외경(外經 : 2세기 후반에 신양성서를 본 따서 만들어진 문서들)에 오면, 이 한계가 무너진다.

안식일 아침이 되어 예루살렘과 그 부근에서 많은 사람이 인봉한 무덤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밤이 되고 주의 날이 가까웠을 무렵, 군졸이 두 사람씩 번을 서고 있는데,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서 우러러 보니, 하늘이 열리고, 두 사람이 큰 광채를 내며 내려와 무덤으로 갔다. 그러자 입구에 있던 돌이 저절로 굴러가고 무덤은 반 쯤 열렸다. 두 젊은이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군졸이 이 사실을 보았고, 무덤을 지키고 있던 백인대장과 장로들도 그것을 보았다.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무덤에서 세 사람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부축하고 하나의 십자가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머리는 하늘에 닿았고, 부축된 사람의 머리는 하늘 위까지 닿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네가 잠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느냐?” 하자 십자가에서 “그렇습니다.”는 대답이 들렸다. (베드로복음서 9-10)

부활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확신하고 기대하던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제자들의 처음 반응을 불신과 완고함*, 의심**, 비웃음***, 체념****, 불안과 경악***** 등으로 묘사한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는 보도는 제자들이 비판적이고 신중하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부활에 대한 그들의 증언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 증언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한 증언의 설득력은 더 커진다.

*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 16,14)
**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마태 28,17)
***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루카 24,11)
****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 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루카 24,21)
*****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루카 24,37) / 부활 후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의 이야기(요한 20,24-29)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수난 보도들이 상당히 일치하는 반면, 부활에 대한 증언과 보도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이 갈릴래아에서만 있었던 것으로 보도하는 반면, 루카 복음서는 예루살렘에서만 예수의 발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부활의 이야기가 제자들의 조작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것이 조작이었다면, 그런 기본적인 것은 일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빈 무덤 이야기의 불일치

빈 무덤 발견의 사화(史話)들도 공관복음서들 간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빈 무덤에 간 여인이 3명이고, 그들은 향료를 예수에게 발라 드리기 위해 갔다. 그들은 무덤 입구에서 비로소 돌을 굴릴 걱정을 한다. 그들은 무덤에서 흰 예복을 입은 젊은이를 만난다.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그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마르 10,8).

마태오 복음서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무덤에 간 여인의 수는 2명이고 향료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들은 묘소를 보러 갔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다가가서 그 돌을 굴러낸다.” 천사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같이 희었다.” “여자들은 겁이 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무덤에서 부리나케 나와, 제자들에게 알리려 달려갔다”(28,1-8). 실제로 그들이 알렸는지 혹은 알리지 않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루카 복음서는 무덤에 간 여자들의 수는 말하지 않고, 다만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과 함께 다니던 여자들”(23,56)이라고만 말한다. 그들은 향료를 가지고 갔고, 무덤의 돌은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남자 둘이 번쩍이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다 알려 주었다.”

빈 무덤 이야기 하나만 보아도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많다. 만들어 낸 이야기라면 좀 더 일치할 것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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