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1

“1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2 남을 심판하는 대로 여러분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여러분도 저울질 당할 것입니다. 3 어찌하여 여러분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합니까? 4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말합니까? 5 이 위선자여, 먼저 자신 눈에서 들보를 빼내십시오.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그것을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여러분을 물어뜯지 않도록 하십시오.” (마태 7,1-6)

▲ ‘심판하는 그리스도’(세부), 프라 안젤리코, 1447년 작품
마태오는 7장부터 이웃과의 관계라는 주제를 다룬다.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이 어디까지 해당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개인 사이의 관계를 의식한다면 3-5절이 눈에 띈다. 국가와 사회의 법률 제도 등 모든 심판에 대한 근본적 언급이라면 1절이 가깝다. 3번이나 ‘형제’(adelpos)라는 그리스어가 쓰인 것으로 보아 교회 공동체 내부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 범죄자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보면 개인 영역을 넘어선 의미를 가리키는 구절 같기도 하다. 사법연수원에서 예수가 초청강연을 하는 것일까. 성서학자 대부분은 오늘의 단락을 국가의 법률제도에 대한 언급으로 여기진 않는다.

1절의 크리노(krino)는 ‘판단하다, 심판관으로 일하다, 판단을 내리다’ 등으로 쓰이는 폭넓은 단어다. 어느 범위에서 쓰여야 하는지 1절은 말하지 않고 있다. 1절과 비슷한 구절은 유다교 문헌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2절부터 5절에서 심판은 인간 사이의 영역에서 다루어진다. 2절 ‘저울질’ 부분과 비슷한 말은 유다교뿐 아니라 여러 문화와 종교에서도 보인다. “사람을 그 죄로 판단하지 말고 그 공적으로 판단하라”는 어느 랍비의 말이 있다. “그 입장이 되기까지 판단을 미루라”고 랍비 힐렐은 말한다. “눈은 다른 것을 보지만 정작 눈 자신을 볼 수는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우리 눈에 거슬리는 남의 잘못은 사실 대부분 우리 자신의 잘못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현대 심리학은 말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1절과 2절은 서로 모순된다. 심판하지 말라고 하고서 심판할 때의 지침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심판에 대한 경고를 말하려고 예수는 눈 안의 들보라는 과장된 비유를 쓴다. 들보와 티의 차이, 즉 불의와 의로움 사이의 차이를 예수가 부정한 것 같지는 않다. 마태오 공동체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문제가 오늘 단락의 배경인 듯하다.

6절의 기원, 원래 뜻, 마태오 복음에서의 의미 모두 수수께끼다. 6절은 예수의 말은 확실히 아니다. 아예 해석하지 말자고 제안한 성서학자도 있을 정도로 조심스런 구절이다. 개는 이방인을, 돼지는 로마인을 가리키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었다. 배교자들이 개와 돼지로 비유되기도 하였다(2베드 2,22). 공동체 내에서 단정하지 못한 장식품(돼지 코 금걸이)으로 치장한 여인을 비판하는 뜻으로 해석한 사람도 있다(잠언 11,22). 납득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하느님 말씀의 거룩함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마태오는 말하는 것 같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비난하는 구절로 6절은 흔히 잘못 인용되고 있다. 그러면 안 된다. 성서를 악의적으로 인용하여 자신의 적수를 비난하는 태도는 성서를 모욕하는 짓이다.

오늘 단락의 전체적인 뜻은 분명하다. 적어도 몇 가지 교훈을 전하려는 것이다. 첫째, 남을 심판할 때 자신도 하느님께 심판받을 것을 생각하라. 둘째, 하느님의 심판에서 우리 자신은 죄인일 것이다. 셋째, 교회 안에서 개인의 잘못은 혼자의 잘못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다.

인간을 여러 부류로 구분하는 관행에서 예수는 우리를 해방시키려 한다. 한국에서 흔히 ‘갑을 관계’로 사람을 나누기도 한다. 못된 버릇이다. 우리 자신이나 남을 우리보다 더 높거나 낮게 보지 않도록 예수는 가르친다.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첫째, 남을 나보다 아래로 보는 잘못을 고치려고 사람들은 많이 애쓰는 것 같다. 둘째, 남을 나보다 높게 보는 것이 잘못이란 것을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겸손이 남에게 배우려는 자세로는 훌륭하다. 그러나 인간은 평등하다는 당당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교황도, 대통령도, 우리 자신도 하느님 앞에 모두 똑같은 존재다. 세상에 더 귀한 사람도, 덜 귀한 사람도 없다.

부자와 권력자와 남자를 예수는 가혹하게 심판했지만, 죄인과 가난한 사람과 여성을 전혀 판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예수의 행동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다. 중죄인에게는 가혹하게, 생계형 범죄에게 너그러운 처사라고 말할까. 정치 · 사회 · 종교에서 힘과 영향력이 큰 사람들에게 엄한 잣대를, 그러나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너그러운 예수다.

진정한 법의 정신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법을 만들거나 다루는 사람보다 법을 만지지도 못한 사람들이 법을 더 어긴 적이 역사에 어디 있던가. 착한 신자에게 엄하게 훈계하지만 역사의 중죄인 앞에선 말도 꺼내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는?

남에게 꼭 읽어주고 싶지만 자신은 읽고 싶지 않은 성서 구절이 많다. 그 사람에게 꼭 적용되길 바라지만 자신에게 그렇지 않길 바라는 구절도 많다. 오늘의 단락이 그런 구절 중 하나일 것이다. 역사의 중죄인들이 자신을 변호하기 좋은 구실로 악용하기 쉬운 7장 1절이다. 악마도 성서를 인용하기도 하고 이용할 줄 안다.

판단을 흐리라는 말이 아니라 자비로움을 강조하는 오늘의 말씀이다. 정의 없이 자비 없다. 남을 가르치는데 서두르지만 남에게 배우길 사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설교는 하고 싶지만 설교를 듣기 싫은 사람을 어찌해야 하나. 배운 것이 적은데 가르칠 것이 있기나 할까. 자신은 배우기 싫어하면서 남에게 배우라고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 대부분 지금 그렇게 사는지 모른다. 판사석에 앉기 바라는 사람은 피고석에 앉은 자신을 상상해야 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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