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0

“25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여러분의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26 하늘의 까마귀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으며 창고에 모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십니다. 여러분은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27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28 여러분은 왜 옷 걱정을 합니까?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29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백합중 하나만큼 입지 못했습니다. 30 믿음이 약한 사람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여러분이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32 그런 것은 모두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33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이런 것도 곁들여 받을 것입니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내일에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합니다.”(마태오 6,25-34)

첫 구절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는 오늘 단락이 앞 단락과 내용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오늘 단락도 재산 문제의 맥락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처세술이나 격언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다. 새, 꽃, 들판 등 자연을 찬탄하고 감상하는 자리도 아니다. 예수가 휴일에 산보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노동윤리를 다루는 자리도 아니다. 예수는 간결한 문장을 즐겨 쓴다. 예수의 청중은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렇다. 예수가 오늘처럼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예외적인 경우는 성서에서 찾기 어렵다. 바울이 철학 선생라면 예수는 이야기꾼이다. 예수는 전문적 개념을 거의 쓰지 않고 일상에서 흔한 소재를 예로 든다. 1.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일까. 2.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오늘 단락의 핵심 질문이다.

‘새’는 하느님이 돌보시는 성서적 본보기다.(욥기 38,41) 까마귀는 덜 귀한 피조물의 예로, 들꽃은 아름다운 사례로 등장한 것 같다. ‘백합’은 이스라엘에 드문 하얀 백합이 아니라 땔감에 쓸모있던 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아궁이’는 한국식 아궁이를 뜻하진 않는다. ‘한 자’(elle)는 52cm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마태오복음에서 여기에 처음 등장한다.

ⓒ장영식

오늘 단락처럼 비판받은 성서구절도 흔하지 않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예수, 경제와 노동 윤리도 모르는 예수, 게으름을 찬양하는 예수, 터무니없는 낙관론자 등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어리석은 내 눈에도 예수는 너무 순진해 보인다. 키 작은 사람들의 고뇌를 예수는 모르는 것 같다. 걱정해서 키가 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자신은 키가 조금 큰 편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예수는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를까. 여인이 옷 걱정 말고 무엇을 걱정할까. 몸보다 옷이 여인에게 더 소중한 것을 예수는 모른다. 저러니 예수는 혼자 사는 편이 차라리 낫다. 누구 집 귀한 딸 신세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예수가 미혼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결혼도 못해본 가톨릭 성직자가 결혼과 가정에 대해 설교할 때 느껴지는 어색함과 그리 멀지 않다.

예수라고 세상살이 팍팍함을 정말 몰랐을까. 식민지 백성의 아픔을 예수가 어디 모를까. 예수 고향 근처에 로마 군대에 의해 몰살당한 마을도 있었다. 예수가 어렸을 때 그 소식을 듣지 않았을 리 없다. 자영업 목수 신세도 어디 그리 편안한 삶이던가. 주변 사람 대부분 역시 가난했다. 시골 농부와 어부의 사람은 예수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갈릴래아 지역에 유다인 아닌 외국인도 많이 살았다. 그들과 유다인의 갈등을 예수는 알았을 것이다.

들판에 쓰러져 굶주려 죽은 새 한 마리도 예수 말을 충분히 반박한다. 전쟁, 식량 문제 등을 거창하게 열거할 필요도 없다. 갈릴래아 지방 가난한 사람들은 마른 들풀을 땔감으로 사용한 것을 예수도 안다. 예수는 자연의 냉혹함을 모르는 순진한 자연 예찬론자가 아니다. 자연 뿐 아니라 인생과 역사의 굴욕과 영광 그 다양한 모습을 예수가 모르지 않는다. 식민지 백성의 설움,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예수는 보고 느끼며 성장했다. 그런데 왜 ‘걱정하지 말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실까.

오늘 단락은 예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마태오 공동체에 방랑 설교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자기 직업을 중단하고 예수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는 그들에게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하는 것 같다. 정착하여 사는 제자들도 그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느님이 돌보실 것이니 밥걱정 하지 말라는 당부겠다. 수고하지 않는 까마귀와 들꽃은 하느님이 돌보시는 사례로 등장한다. 그들도 하느님에게 소중하지만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하느님에게 소중하다. 피조물을 인간이 책임지듯이 인간을 하느님이 책임지신다.

예수를 전하다 굶어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겪는 당연한 걱정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걱정이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걱정이 인간을 힘들게 하고 기쁨을 앗아가기 때문이 아니다. 걱정으로 인해 인간은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걱정을 심리학으로 보지 말고 신학적으로 보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종교 정보를 많이 가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에게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를 팔아 자기 지갑을 채우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도 있고 교회 밖에도 있다. 종교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고 신자 중에도 역시 있다. 예수 장사꾼이 없는 나라는 세상에 없는 것 같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은 우선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으라는 말씀이다. 자기 지갑을 채우려는 속셈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늘 단락은 교회에 심각한 질문을 안겨준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종교인의 돈 문제, 교회의 가난 문제를 돌아보라는 뜻이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아니다. 바로 예수 가르침이 교회에 정말 두려운 것이다. 성서는 우리 살 속에 박힌 아픈 가시다. 성서 말씀이 두려워 성서를 멀리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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