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수녀의 이콘 응시]

                                             

En Cristo
가끔 병원에 가면 주위에 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이 만큼밖에 아프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낄 때가 많았을 것이다. 요즘은 병원에서 정밀 검사하자 하면 암이고, 남다르게 아프다 하면 희귀병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땐 육체적 고통을 덜 느낀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보도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이 기사를 읽고 평소에 좋은 그림을 많이 감상한다면 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신자 중에서 지금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겐 어떠한 이콘이 좋을까를 생각했다.

바로 이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난의 성모) 이콘이다. 신자 가정이면 다섯 집 건너 하나씩은 있음직한, 없더라도 보여 주면 “아! 이거!” 할 정도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이콘이다. 작가가 누군지 모르지만 수 백년도 훌쩍 넘는 역사와 수많은 치유의 기적과 은사들, 여러 번의 자리 옮김 등으로 수난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참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다.

몇 년전 로마에서 언어를 배울 때 학원 근처 성 알퐁소 성당에서 매일 아침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 성당에서는 미사가 끝나면 제대 앞에다 바리케이트를 쳐 놓았는데 그때는 왜 그러는지를 몰랐고, 감실 위에 바로 이 이콘이 있었는데 그것이 원본인 줄도 몰랐다. 나중에야 내가 참 복된 곳에서 미사 참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이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사가 끝나면 바리케이트 앞에서 이콘을 바라보다가 학원으로 가곤 하였다.

어느 날 성당지기 아저씨가 이런 나를 매번 제의실에서 지켜보셨다며 “성모님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이 가서 보아라”고 허락하였다. 이후 몇 달 동안은 이 이콘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영광을 누렸고 그 행복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자! 이제 이콘을 응시하자.

두려움에 싸여 있는 아기 예수님과 그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동시에 다가온다. 성모님의 눈에 슬픔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서도 인자함과,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듯한 영적 힘이 느껴진다.

왼쪽의 미카엘 대천사가 들고 있는 해면에 꽂힌 막대기와 예수님 옆구리를 찔렀던 창, 오른쪽의 가브리엘 대천사가 들고 있는 십자가를 보고 놀란 아기 예수님이 황급히 달려 왔다는 것을 보여주듯 한쪽 샌들이 벗겨진 채로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은 두려움으로 인해 도움을 청하듯 어머니의 엄지손가락 하나를 두 손으로 거머쥐고 있다.

아기 예수님의 떨고 있는 조그만 두 손을 우주적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듯 성모님의 손은 참으로 따뜻해 보인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인해 심장이 얼마나 쿵쾅거렸을까. 그 고통을 아는 듯 그분을 향해 머리를 기울이고 바라보는 슬픔 어린 시선은 마치 우리들을 바라보는 듯하지 않는가?

마음이 아픈 이콘이다. 그러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가 담긴 이콘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왼손은 세상 어떠한 무서움이 닥쳐도 혼신을 다해 지켜주는 강한 모성의 상징처럼 보인다.

우리는 삶에서 주어지는 많은 십자가와 찔리고 찢기운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간다. 직접적인 물리적 고통보다 내가 병들어 신음할 수밖에 없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다.

사실 나의 고통은 나만 안다. 주위에서 아무리 위로의 말을 해주어도 나의 고통이나 아픔을 대신해줄 수 없다. 어차피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이라면 원망하고 울부짖고 몸부림치다 지친 눈을 들어 이 이콘을 바라보자. 성모님의 눈 속에 자신을 담아 보는 것이다.

그분은 말씀 없음으로 말씀하신다.
내 안의 무수한 말들이 혼돈 속에 있을 때 그분의 눈 속에 나를 두어 본다.
살갑게 그분의 얼굴에 나의 볼을 대어 본다.
그분을 느끼려는 작은 몸짓과 생각에서 시작되는 이것이 바로 관상이요, 묵상이요, 기도의 맛들임이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저렇게 하는 것이다를 다 떠나서 자신만의 시간 안에 머물며 고요히 그분을 응시한다면 어느새 성모님의 품에서 고른 숨을 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희망이 없어지면 제일 먼저 바라보는 것을 포기 한다. 그래서 입보다 더 굳게 눈을 감아 버린다. 바라본다는 것은 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희망은 나를 기도에로 초대하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기왕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콘에 시선을 주자. 그래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에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어머니께로 나아 가 보자. 바로 앞에 이콘이 있다면 부디 눈을 감지 말기를.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벌써 나는 성모님 품안에 있으며,
또한 그분은 나를 다독이고 있기 때문이다.

임종숙/ 루시아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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