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루카 12,32-48

'너희들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지극히 높고 엄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감히 부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율법을 주고, 그것을 철저히 지킬 것을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권(人權)을 소중히 생각하는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과거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에서 통용되던 신앙언어를 절대적인 언어로 생각하고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으로 상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분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제물을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얻어 우리가 잘 살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렇게만 믿고 있다면, 오늘 복음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이 하나의 미사여구(美辭麗句)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대조되는, 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셨고, 자녀가 부모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되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호세아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자상하게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초기신앙공동체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우리의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우리가 그분의 베푸심과 돌보심을 배워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의(決意)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이미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우리가 갈 내세(來世)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있습니다.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이라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또 불안하게 하는 하느님일 것입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두렵습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法廷)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두렵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님은 그분을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는 하느님이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편견을 넘어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는 그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러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분이지만, 우리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현하며 살 때, 우리 실천의 원천으로 확인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행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자기 주변에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기다리며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종은 주인을 주목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의 일, 곧 섬김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에다 신앙인을 비유하면서, 하느님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재물이나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 앞에 우월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질서에서는 다릅니다. 재물과 지위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마음껏 누리고 행세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기에게 베푸셨기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물은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하고, 지위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자기 한 사람 잘 될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 된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많이 바치는 자에게 축복해주는 이 세상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준 심청전의 용왕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듯이, 대가 없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과응보의 원리 따라 베풀지 않습니다. 성공한 자녀를 사랑하고 실패한 자녀를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자녀 모두가 훌륭히 살 것을 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서, 은혜로우신 당신의 생명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삽니다.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역사 안에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현합니다. 가진 것을 이웃에게 베풀면서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신앙인은 ‘기꺼이 베푸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베푸심을 당당하게 실천하면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질서가 자기 주변에 실현되는 사실을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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