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7

“여러분은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울한 표정을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자기 얼굴을 찌푸립니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숨어 계신 아버지께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숨겨진 일을 보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마태오 6,16-18)

자선과 기도 다음에 예수의 기도가 등장했고 그 기도에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에 대한 간청이 포함되며 이제 단식이 언급된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 세가지는 서로 연결되며 특히 단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 문제와 연결되어 생각하라는 뜻이다. 땅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다음 단락을 준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얼굴 찌푸림은 얼굴을 씻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표정은 어둡고 슬프게 보이겠다. 거리에서 선행을 알리는 것이나 잘 보이는 교차로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그런 표정은 단식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율법은 단식을 화해의 날에 하도록 규정한다.(레위기 16,29; 23,27) 또 민족적 불행이나 가뭄 같은 위급상황에서 단식이 흔히 행해졌다. 언제나 기도와 연결되는 단식은 악을 멀리 하고 하느님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용서를 청하는 목적을 지닌다. 예수는 적어도 공식 활중에는 단식하지 않은 듯(마태오 9,14) 하지만, 그전에 유다교 단식 규정을 충실히 지켰을 것이다.

▲ 성바오로딸수도회 여주 사도의 모후 집 성당 십자고상. ⓒ 한상봉 기자

오늘 단락은 개인 단식에 특히 열심이던 바리사이파를 겨냥한 듯하다. 슬픔과 회개의 표현, 겸손의 행위와 기도의 표시로서 자발적인 개인 단식은 유행하였다.(마태오 9,14; 루가 18,12) 단식하는 사람은 자루 모양의 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몸을 씻지 않고 기름을 바르지 않고 맨발로 걷는다. 이런 겉모습에 대해 공동성서는 비판하기도 하였다.(이사야서 58,6) 2세기경 랍비들은 지나친 단식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에 담긴 그들의 진지한 단식 자세는 우리가 존중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유다교 단식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하는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개신교 일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단식의 정당화도 비판도 의도한 구절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때에 그들도 단식하게 될 것이다”(마르코 2,20)처럼 단식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근거를 세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구절도 아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단식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식할 때 기름을 바르고 씻으라는 말은 예수의 삶과 연결된다. 진정한 단식은 기쁨이니, 이 기쁨을 준비하라는 뜻이다.(마태오 13,44; 루가 15,7)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단순한 위생 습관이 아니라 먼저 기쁨의 표현이다. 안식일에 얼굴을 씻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얼굴 씻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마태오 9,15) 로마인의 목욕탕을 칭찬하는 랍비들도 많았다. 목욕탕 없는 도시에는 살지 말라고 말한 랍비도 있다. 문맹이 거의 없고 몸을 자주 씻는 점에서 유다인들은 유럽인보다 훨씬 앞섰다. 성서공부에 대한 열정에서도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 견줄 바가 아예 못 된다. 유다교에 비교하면 창피한 점이 그리스도교에 하나둘이 아니다. 불교나 이슬람교에서 배울 좋은 점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마태오 공동체도 단식하였다. 그래서 단식의 의미와 바람직한 태도를 마태오는 보여주려 하였다. 바리사이와 경쟁을 의식하는 마태오 공동체 상황에서 오늘 구절이 강조되었다. 초대교회 중요한 문헌중 하나인 디다케(Didache)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여러분이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안식일 후 두 번째와 다섯 째 날(화,목)에 단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십시오.”(Didache 8,1) 바리사이파를 아예 대놓고 위선자라 칭한 것이다. 그런 문헌이 남긴 잘못된 영향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도 성당과 교회에서 ‘위선자’하면 곧장 바리사이를 떠올릴 것이다. 잘못된 성서교육 탓이다. ‘빨갱이, 종북’ 이라는 단어에 지겨워하면서도 ‘위선자’하면 바리사이파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진정한 단식은 어떤 것일까.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벌이고 싸움이나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때리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치워라. 너희 기도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동족을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이다.”(이사야 58,4-7) 비슷한 경고가 예레미아 14,12, 즈가리야 7,5, 요엘서 2,13에도 보인다. 마태오 공동체가 이런 점을 좀 더 의식하고 강조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유다교와 경쟁을 꼭 의식해야 했을까. 시대 상황 탓도 있었지만, 이런 면에는 참 속 좁은 초대교회 사람들이다.

우리 역시 그들처럼 비슷한 잘못을 자주 범한다. 나를 돋보이려고 남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예수를 돋보이려고 유다교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유다교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 다음 예수의 특징을 차분히 알려주는 방식이 초대교회에 더 좋지 않았을까. 유다교가 죽어야 그리스도교가 사는 것이 아니다. 유다교가 살아야 그리스도교도 사는 것이다.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에게 누님이나 형과 같은 존재다. 형제자매 종교가 살아야 내 종교도 산다. 이웃 종교가 잘 되기를 비는 자세가 아쉽다. 초대교회에 이런 정신이 모자란다. 바울에게도 그런 대범함이 부족하다. 유다교가 없으면 ‘하느님의 존재, 창조사상,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그리스도교가 어찌 알 수 있으랴. 유다교를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능력도 사실 유다교 덕택 아닌가. 가톨릭을 보는 개신교에도 그런 고마운 자세와 대범함이 아쉽다. 배은망덕은 열등감의 고백일 뿐이다. 비판 이전에 먼저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

남에게 가한 비판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말과 글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하는 말이나 신중하지 않은 글은 결국 자신을 옭아맨다. 사람의 죄 90%는 아마 자기 입과 글에서 나올 것이다. 바리사이에 대한 마태오의 비판을 이제 그리스도교에 돌려야 하겠다. 마태오 역시 그러한 의도로 오늘 구절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단식은 선행이나 기도에 비추어 오늘날 그 비중이 크게 약화된 것 같다. 그러나 단식은 농사짓는 농부의 심정, 요리하는 여인의 마음, 먹을 것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느낄 좋은 계기다. 자본주의의 탐욕을 반성할 기회도 되겠다. 단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감을 갖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단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해서 단식을 선택할 수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을 꼭 기억할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 하는 상징이자 동참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적이 역사상 거의 없었다. 굶주려 죽어간 백성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굶어죽은 성직자나 목회자는 아직 없었다.

20여년전 폴란드 Auschwitz 나찌수용소를 방문하였다. 유다인 포로들 모습이 담긴 연필 초상화 그림이 전시실에 있었다. 모두 면도를 하고 환히 웃는 표정이다. 억압받고 굶주린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은 동료 얼굴을 그렇게 그렸단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그들은 매일 깨끗이 면도했단다. 목숨을 빼앗아도 정신은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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