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일기-김태진 신부]

얼마 전 시골에서 사목을 하는 친구 신부를 만났다. 지난 부활 전 성삼일에 가서 피정을 하며 보았던 학생센터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안부를 물었더니 최근에 있었던 소카 이야기를 해준다.

소카(가명)는 11학년(고등학교 2학년)이다. 친구 신부가 보좌로 있는 성당 학생 센터에서 기숙을 하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16년 만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지금 소카의 엄마와 결혼해 살다가, 얼마 되지 않아 끄로쩨라는 도시에 가서 다른 여자와 다시 살림을 차렸다. 소카의 엄마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마누라와 애를 버리고 떠났다가 16년만에 돌아온 남자를 받아주었다. 이 아버지가 나타나선 소카를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단다. 친구 신부가 소카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양 부모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학교와 성당의 학생 센터에 낼 돈이 없어서 더 못 가르치고, 프놈뻰의 공장에 보낼 계획이란다.

▲ 독서, 2002, 캄보디아 꼼뽕스쁘. ⓒ김태진

학생 센터는 시골 벽지의 중 고등 학생들이 학비가 부족하거나, 읍면 소재지의 중고등학교가 너무 멀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벽지 학생들을 돕기 위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학생 기숙사이다. 학생을 받을 때 부모 동의서와 함께, 부모의 동의와 참여, 지원의 상징으로 매달 약간의 돈 (친구 신부 본당의 경우 한 달에 5천원)을 받는다. 실제 숙식비나 다른 기타 소요비용에 비하면 몇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돈이다.

소카 부모의 그 기가 막히는 소리에 친구 신부가 그 돈을 안내도 좋으니 소카가 고등학교 마칠 때 까지만 다니도록 해 달라 부탁하니, 부모들은 또 옷 값 들고 뭐 들고 해서 집에서 도저히 못 키우겠다고 했다. 그 어이없는 소리에 친구 신부는 농반진반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서 애를 못 키우겠다면 아이를 나를 줘라, 내가 키울 테니’라고 했다. 부모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이 소카네 집으로 들어왔고, 하는 양을 보니 소카 신랑 될 집, 즉 예비 사돈네였다. 소카 부모는 돼지고기 몇 근과 다른 음식을 사돈댁에 전해주었다. 그리 쩔쩔매며 음식을 해 바치는 게 이상해 알아보니 아버지는 사돈집에서 벌써 삼천 달러를 끌어다 썼기에, 돈도 갚아야 하고, 딸까지 그 집에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신부 앞에서는 양심이 있어 그런 소리는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공장이 쉬는 날인지 소카는 고향의 학생 기숙사를 찾아왔다. 친구 신부는 성당에서 소카에게 물었다. “네 바램은 뭐니?” 소카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다. 소카의 바램을 확인한 신부가 재차 물었다. “앞으로 한 십 년 정도를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안 만나고 공부만 할 수 있겠어?” 소카는 그렇게라도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면 집에 가서 짐을 챙겨서 와라”하고 집으로 보냈다. 소카는 짐을 싸서 나오다가 아버지에게 들켜버렸다. 아버지는 소카 보는 앞에서 엄마를 때렸다. 소카는 겁을 먹고 교회에 전화를 했다. 엄마가 맞고 있다고. 친구 신부는 소카에게 어서 집에서 나오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소카의 짐을 빼앗고 방에 감금을 시킨 채, 학생 센터와 관련된 모든 연락을 끊게 했다.

주말이 되어 본당 신부가 돌아왔을 때 소카는 프놈뻰으로 가고 없었다. 반세기를 캄보디아에서 선교사로 살아온 주임 신부가 소카의 조부모, 부모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돌아와선 “크마애 관습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했다. 소카 부모는 공장이 어딘지 절대 이야기해주지 않고 캄보디아 중북부의 끄라쩨에 있는 카사바 농장으로 일하러 가버렸지만 주임 신부는 기어코 공장을 찾아내서 소카를 만났고 프놈뻰의 살레시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기술학교 여학생 기숙사에 소카를 데려다 놓았다. 몇 일 뒤 (7월 둘째 주) 12학년 올라가는 학년 진급 시험이 있고, 주임신부는 이번에 소카가 그 시험에 합격하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프놈뻰으로 전학을 보낼 계획이다.

소카 이야기는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라는 어른들 말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한 맺힌 한국의 어머니들을 떠올리게도 하고, 시골에서 민초들과 더불어 살며 교육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의 교육현실에 대해서 경험하는 바, 그리고 일선에서 대면하는 어려움도 드러낸다.

캄보디아의 수많은 비정부기구들도 교육 사업을 한다. 건물을 짓고, 교사들 채용해 월급을 주며 '물리적 교육 환경'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우리의 할머니들, 어머니들이 학교가 없어 교육을 못 받은 게 아니듯, 학교 건물이 늘어난다고 캄보디아의 중고등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받는 게 아니다. 교사의 낮은 출석율이나 공교육의 질은 눈감아 준다하더라도, 자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모들의 인식의 전환,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의 공유와 실천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비정부기구의 교육 사업이 건물과 자금과 보급품을 조달하는 후방에 있다고 비유한다면, 가톨릭교회, 특히 선교사들은 최전선에 서 있다.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 함께 살며, 먹고 사는 일 너머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으로 증거하며, 함께 희망을 공유하고 실현해 나가려 애쓰기 때문이다.

이런 최전선의 선교사들이 맞닥뜨리는 첫번째 어려움은 '전근대성'이다. 생존의 수준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골의 농사꾼 부모들은 돈 몇 푼을 위해 자식을 도시의 공장에 보내거나 농사일을 돕고 소몰이를 하라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이 시골의 농사꾼 부모들은 내전 특히 붉은 크마애 공산 정권의 암흑기를 겪었고 그 뒤 혼란스런 근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세대이다.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시대 환경에서 이전의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생존해 온 부모 세대. 선교사들이 이들의 무지와 가난의 세습을 막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부모들의 인식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의 가능성을 열어주려 애쓰는 선교사들은 이들의 삶에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 어떻게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교육 인식을 갖도록 할 것인가?

또 다른 어려움은 '속물근성'이다. 대부분 불교 신자인 시골의 부모들은 가톨릭이나 성당을 그저 외국인들이 하는 ‘엉까’라고 생각한다. ‘엉까’는 ‘권위있는 조직’이라는 크마애 말이다. 과거 ‘붉은 크마애의 공산 정권’을 엉까라고 불렀고 그 이후 원조를 위해 들어온 여러 비정부기구들도 엉까라고 부른다. 엉까는 힘도 있고 돈도 있으니 자식을 거기에 보내면 뭐든 혜택을 받을 거라는 생각으로 아이를 엉까에서 하는 학생센터에 보낸다. 입 하나 덜고 공부도 시키고 그러다 아이를 끈으로 운이 닿으면 그 엉까가 우물도 파주고, 집도 지어 주니.

그러나 그 엉까가 부모의 기대만큼 혜택을 주지 않으면 미련 없이 아이를 빼간다. 친구 신부는 이를 두고 ‘거래’라는 씁쓸한 표현을 썼다. 부모가 자식을 사이에 놓고 외국인들과 하는 거래. 선교사를 핫바지로 여기며 대놓고 도와 달라 떼를 쓰거나, 우는 소리, 죽는 소리 해가며 빌려간 돈을 떼먹거나, 혹은 도와주지 않는다고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이 시골 촌부들의 순박한 웃음과 겸손 뒤에 가려졌던 ‘거래의 속물근성’이 드러나, 종종 선교사들이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배척당하기도 한다.

사실 이천 년 전에도 그랬다. 배고픈 군중들을 측은하게 여겨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했더니, 군중들은 그가 누구인지, 그가 말하는 아버지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무관심한 채,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고, 자신들의 속물적 기대가 깨지자, 미련 없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다. 그래도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교육의 최전선에서 선교사들은 아직도 한 손을 벌려 이전 세상을 사는 농사꾼 부모들을 껴안고, 또 다른 한 손을 벌려 자식들을 쓰다듬으며 더 나은 다음 세상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변화는 시작되었다. 단 우리의 성급한 바람 보다 더딜 뿐.

김태진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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