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9]

예수는 하나의 놀이를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유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되는 놀이는 자유로운 사람이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놀이를 알려주는 예수에 대한 말들은 기쁜 소식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오늘이다. 뷔페식당, 슈퍼마켓, TV채널, 여행안내서 등에서 현대인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선택한다. 자유를 방종과 혼동하던 유럽 중세 봉건사회와 같이 자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 러시아 이콘, 침묵하는 그리스도, 작가 및 연대 미상
상징은 무엇을 암시하는 사건, 사물 혹은 행위로서 하나의 놀이, 곧 어떤 투신(投身)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하나의 상징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상징이 발생시키는 놀이의 구조를 존중하면서, 그 놀이 안에 자신을 잃고,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스스로를 그 놀이에 헌신(獻身)하지 못하고, 나를 긍정하고 과시하기 위한 놀이, 혹은 나의 편의를 위한 놀이로 전락시키면, 그 놀이가 지닌 상징성은 파괴된다. 오늘날 고해성사가 과연 예수가 선포한 죄의 용서를 사람들이 실감하게 하는 놀이이며, 성체성사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삶의 놀이를 발생시키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성사 집전자의 권한이 강조된 나머지, 그 놀이들이 성직자들을 긍정하고, 그 품위를 높이는 가상적(假想的)인 것이 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예수가 하는 행위들은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 놀이들은 사람들의 놀이를 기대하는 행위들이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았다. 예수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천국의 꿈을 주어서 현재 삶의 고통을 잊게 하는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그런 유혹을 물리쳤다. 예수는 사람들을 쉽게 현혹시키는 메시아적 유혹을 거절하였다. 예수는 하루아침에 변화된 실존을 줌으로써 인간 역사 안에 있는 노고, 위험, 어리석음 등을 마술적으로 해결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은 인간 삶 안에 당연히 있는 것들이다. 예수는 그런 인간 현실에서 도피하여, 기적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길을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였다. 예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그 삶의 상황을 기적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도인은 그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성서는 기적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하혈하는 부인(마르 5,21-34), 예리코의 맹인(마르 10,46-52), 나병환자(루카 17,11-19) 등, 예수로부터 기적의 혜택을 받은 인물들에 대해 성서는 침묵한다. 그 침묵은 의미심장하다.

상징적 행위는 우리 삶에 숨겨져 있는 힘을 잠깐 보여주는 데에 있다. 그러면 그 힘으로 열리는 놀이가 있다. 그 놀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이다. 예언자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난다. 예언자는 정치가도, 심리학자도, 행정가도 아니다. 예언자는 가능성이 솟아나게 하고, 그 가능성 앞에 사람들을 각성시킨다. 계시되고, 각성한 힘을 실천하여 놀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각자의 자유에 맡겨진 일이다.

상징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면, 놀이가 발생한다. 지금까지의 관행이 정지되고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놀이가 시작되면, 그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그것을 경험하였다. 예수가 개입할 때,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항상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수는 상식에 준해서, 그 시대의 관행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물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사물이 영의 힘에 굴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예수는 유대교의 질서와 관습을 무시하였다. 예수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의 행복 선언은 그분이 가진 가치관이 우리의 것에 비해, 얼마나 역구조적(逆構造的)인지를 보여 준다.

예수의 자세와 실천이 오해되고 격렬한 반대를 만나는 것은 당연하였다. 예수가 한 놀이는 그 시대 기득권층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예수는 체포되어 재판 받는다. 예수는 정통사상과 타협주의가 통하는 우리의 나라를 위한 놀이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참으로 예언자였다. 예수는 오해 당하고, 바보 취급당하고, 소외되어, 결국 목숨을 잃는다. 모든 예언자는 죽임을 당한다.

예수는 만나는 사람들의 상황과 경험에 따라 놀이를 발생시켰다. 놀이는 준비된 하나의 기술이 아니다. 신앙인들이 흔히 착각하는 점이다. 신앙은 하느님을 조종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술이 아니다. 소원성취를 하겠다는 신앙인의 욕구는 가상적 놀이를 발생시킨다.

놀이는 삶이지 법으로 해결되지도 않고, 이미 만들어진 공식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음악 연주에는 지켜야 하는 법이 있지만, 그 법이 연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각자가 자유롭게 심취하여 매일 그 놀이를 반복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놀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것에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놀이는 인간 실존의 보편성을 증언하지만, 시대, 문화, 사회 및 인품에 따라 그 언어와 모습은 다를 수 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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