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5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 6,13)

도움을 간청하는 오늘의 구절로 예수의 기도는 마무리된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유혹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은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을 가려내신다”(시편 11,5).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께 시험을 요청하기도 한다. “하느님이여, 저를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 보소서”(시편 26,2).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유다교에도 풍부하다.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도 유다교에 역시 흔하다.

오늘의 구절을 종말론적(終末論的)으로 해설하려는 의견도 있었다. 유혹이라 번역된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를 세상 끝 날에 벌어질 일을 가리키는 단어로 보자는 제안이다. 〔부정적 느낌을 주는 종말론이란 용어보다 긍정적 의미의 완세론(完世論)을 나는 선호한다.〕 그러나 유다교 묵시문학에도 신약성서에도 그 단어는 마지막 일을 뜻하는 전문용어(terminus technicus)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보통 만나는 ‘유혹’을 가리키는 단어다.

▲ ‘주님의 기도’,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6)
그렇다고 인생 전체를 일반적으로 유혹으로 보는 시각은 무리다. 초대교회 일부 금욕적 흐름에서 그런 제안이 흔했다. “지상에서 모든 인간적 삶은 유혹이다”(Origenes). 어느 종교에서나 금욕주의자들이 정통을 자처하는 경향이 많다. 페이라스모스에 대한 번역어로 영어에서 시험(testing)보다 유혹(temptation)이 제시되겠다. 독일어로 시험(Erprobung)보다 유혹(Versuchung)이란 단어가 더 적절하다. 시험(peira)보다 그 뒤에 악의 세력이 버티고 있는, 피하고 싶은 유혹을 가리킨다.

하느님이 인간을 유혹할 수도 있다고 전제하는 기도일까? 과연 하느님은 인간을 유혹하는가? 하느님이 인간을 유혹한다면 하느님의 자존심과 품위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코린 10,13). 하느님이 마치 인간을 유혹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는 바울의 말을 변호하려 학자들은 많이 애썼다.

“유혹을 당할 때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실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야고 1,13). 하느님은 인간을 유혹하지 않는다.

예수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는다. 예수는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히브 2,18). 예수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받으신 분입니다”(히브 4,15).

예수와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너무나 많다. 공자나 부처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다른 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분들이다. 그들과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땅을 밟았고 우리처럼 숨 쉬며 먹고 살았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구절은 루카 복음 예수의 기도에 없고 오직 마태오 복음에서 나타난다. 악의 세력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악으로부터 해방을 바라는 기도다. ‘악’이라 번역된 명사 오네루(onerou)에 관사가 없는 탓에 남성명사인지 중성명사인지 일찍부터 논란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가톨릭은 불가타(Vulgata, 신약성서 라틴어 번역본―그리스어 성서 원본을 제치고 가톨릭교회에서 공식 사용된 번역본)에서 ‘아 말로’(a malo : 악에서), 중성명사로 이해하였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구절을 보면 그 단어는 중성명사인 것 같다(마태 13,19; 13,38; 2티모 4,18; 디다케 10,5). ‘악’을 남성명사로 본다면 악을 인격적 존재로 본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악(ponerou)은 일상에서 만나는 질병, 나쁜 사람, 나쁜 욕심, 정치적 억압을 가리킨다. 유혹에서 지켜달라는 것뿐 아니라 악에서 해방되도록 간청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적극적으로 인간사에 개입하고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구하소서”(hruesthai)는 하느님의 구원적 · 해방적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겨낼 수 없을 만한 매력적인 유혹에 마주할 때,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한다는 뜻의 오늘 구절이다. 악에 저항하려는 눈물겨운 투쟁을 위로하는 기도이다. 정작 죄는 인간이 지어놓고 하느님 탓하려는 사람을 편드는 기도가 전혀 아니다.

마치 하느님이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투의 교훈적 설교가 오늘도 한국 교회에 여전하다. 하느님을 본의 아니게 못된 존재로 격하시키는 설교다. 엉터리 설교에 대한 토론과 반론의 기회도 없는 미사와 예배 형태이니 더 안타깝다. 페이스북에 게재되는 설교 중에 신학적 근거가 빈약하거나 설교자의 감상문에 불과한 설교가 수두룩하다.

예수의 기도는 신앙이 탄탄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기도는 아닌 것 같다. 이미 지닌 굳건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보다 유혹에 빠지기를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의 기도다. 평범한 사람을 배려하는 예수의 마음이 우러나는 기도다.

보존되어 있는 당시 유다교 기도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쓰였다. 지식인들로 개인 기도할 때 아람어를 허용하긴 했다. 유다교 회당에서 바친 기도는 아람어가 아닌 히브리어였다. 예수의 기도는 가난한 사람의 언어를 존중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를 무시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취향을 예수는 함께하지 않았다. 남미 사람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기도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오늘 미사와 예배에서 드리는 기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과 그 언어를 잘 담아내는 편인가.

악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과제는 이제 우리에게 있다. 악을 이겨내는 책임과 권리도 우리에게 주어졌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악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악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악의 세력에 가담하고 있는지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소홀하였다. 악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축소해 버린 잘못도 그리스도교 자신에게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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