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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시인, 구상오늘… 영원을 찾는 수행자, 시인 구상(具常) - 5

구상의 대표작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집중적으로 저술되었다. 일본 체류 중에 완성해서 1967년 1월부터 4월말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밭일기’ 100편은 연작 장편시의 효시가 되었고, 자전 연작시 ‘모과옹두리에 사연이’는 1970년대에 <현대시학>에 총 90편 연재하였다. 특히 이 시집에는 역사 속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아온 시인의 실존적 고민과 체험과 내면적 편력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했다. ‘과일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처럼 부실한 인간으로 살면서 악전고투한 안간힘이 배어 있다.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나의 생애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칠죄의 연못을 휘저어 온
모험과 착오의 연속,
나의 심신의 발자취는
모과 옹두리처럼 사연투성이다.

예서 앞길이 보이지 않기론
지나온 길이나 매양이지만
오직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모과옹두리에 사연이’ 중에서)

   
▲ 구상 시인 (사진 출처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가장 유명한 신앙에세이 <그리스도 폴의 강>(1978년), <나자렛 예수>(1979년)가 출간된 것도 이 시기였다. <영원 속의 오늘>(1976년), <우주인과 하모니카>(1977년)도 이 시기에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구상은 역사현실에서 빠져나와 관상적 세계에 몰두한다. 이것은 그의 행운이면서 불행이 아니었을까.

구상은 왜관을 떠나 한강이 보이는 여의도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며 서재의 이름을 ‘관수재’(觀水齋)라 짓고 ‘관수세심’(觀水洗心)에 몰두했다. 구상은 <그리스도 폴의 강> 프롤로그에서 “그리스도 폴!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습니다”라고 썼다. 이어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 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 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 나의 시도 구원의 빛을 보리라는 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라고 적었다. 구상에게 강은 인생의 배움터였다.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 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구상, ‘강 16’)

그는 ‘신비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고,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고 고백한다(‘강 20’). 구상이 의식했는지 의식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시어에는 자괴감이 끝없이 반추된다. 그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은 이렇듯 단명(短命)한 것인가” 한탄한다(‘강 27’). 그리고 강에서 내면의 평화를 희망한다.

   
▲ 구상 시인 (사진 출처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한방울의 물로
강이 되어 흐르는
나는, 이제 내가 없다.

그렇듯 나를 꿈꾸게 하고
그렇듯 나를 절망하게 하고
그렇듯 나를 달뜨게 하고
그렇듯 나를 외롭게 하고
그렇듯 나를 불안하게 하고
그렇듯 나를 비치게 하던

내가 쓰러지고 없고
오직 흐름일 뿐이다.

그러나 비로소 나는
천연의 질서와 자유와
그 평화를 누린다.

(구상, ‘강 48’)

그의 사람에 대한 진솔한 고백은 시를 통해 계속 이어진다. 그에게 오늘은 추하지만 오늘에 영원을 담고 있기에 늘 희망을 준다. 거듭 절망하고 거듭 희망을 품게 해서 고마운 것이 ‘신앙’이었다. 구상은 ‘고백’이란 시에서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읊었지만, 나는 마음이 하도 망측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어쩌구커녕 숫제 두렵다. 일일이 밝히기가 민망해서 애매모호하게 말할 양이면 나의 마음은 양심이 샘이 막히고 흐리고 더러워져서 마치 칠죄의 시궁창이 되어 있다”고 거듭 아뢰면서 “주님! 저를 이 흉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만 이 참회가 개심으로 이어질지를 나 스스로가 못 믿으니 이를 어쩐다지?” 한다. 이 회한을 ‘오늘서부터 영원을’이라는 시에 담고 있다.

오늘도 친구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 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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