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4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주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태 6,12)

유다교에서 용서는 중요한 기도 주제였다. 하느님의 용서가 인간 사이의 용서와 연결되어 있다고 유다교는 가르친다. 인간이 동료 인간을 용서하기 전까지 하느님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자비로운 사람에게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죄가 존재하는 세상을 오늘의 구절은 전제한다. 용서라는 주제는 마태오 복음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복된 선언 다섯째 말씀에서도 이 주제가 다루어졌다.

▲ ‘주님의 기도’,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6)
용서에 대한 예수의 기도에서 특징은 앞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앞 구절은 세상 끝 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지금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언급이다. 용서에 있어 인간의 행동을 이처럼 강조한 기도는 유다교에서 보기 어렵다. 예수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도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전제를 마태오는 생각한 것 같다.

원래 ‘타 오페이레마타(ta opeilemata)’는 채무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안식년에 대한 공동성서(구약성서) 70인역 신명기에 같은 단어가 보인다. “7년에 한 번씩 남의 빚을 없애주어라. …… 누구든지 동족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빚을 없애주어야 한다. 동족에게서 빚을 받아내려고 하면 안 된다. ……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신명 15,1-4; 1마카 15,8). 안식년 제도가 시행되는 교수 사회에서 안식년의 이런 뜻이 제대로 이해되고 있을까. 안식년은 쉬라는 기간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시기이다.

인간 사이의 경제적 빚에 얽힌 상황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로 확장시킨 구절은 유다교 문헌에 많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도 이런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 “네 모든 빚을 나는 없애주었다”(마태 18,32). 인간은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보여준다.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기도와 행동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기도는 행동의 전제이다. 행동 또한 기도의 일부다. 용서를 비는 기도는 용서하는 행동을 전제하고 포함한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을 예수도 모르지 않았다. 죄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예수는 외면하지 않았다. 죄인에 대한 예수의 연민이 예수의 기도에 담겨 있다.

마태오 복음 9,6과 루카 복음 7,47을 제외하고 예수는 죄의 용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전혀 없다. 죄와 용서 문제를 예수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느님 소관이라는 생각을 예수가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조차 죄의 용서에 대해 삼가는 태도로 처신하였다. 그런데 오늘 적지 않은 종교인들이 죄를 용서하니, 못하니 함부로 운운한다. 누구는 구원을 받니, 못 받니 운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 경거망동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루카 복음의 예수의 기도에서는 ‘죄’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고 ‘잘못’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루카 복음에 나타난 표현이 마태오 복음의 표현보다 더 오래된 원본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둘 다 경제적 의미의 빚에 비유해 토대로 삼고 있다. 예수 시대 채무자들의 어려운 경제적 처지에 대한 자료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빚의 문제를 서둘러 죄의 문제로 돌릴 필요는 없다. 경제적 어려움 탓에 생기는 죄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죄를 낳는 세상은 얼마나 악한가. 그런 죄를 짓도록 상황을 악화시킨 사람들의 죄는 얼마나 큰가. 제3세계 국가 채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어떠한가. 죄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신학에서 그동안 소홀히 다룬 면이 적지 않다. 경제범죄를 애써 외면해온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성공과 성장을 노리는 교회 자신이 죄를 짓기도 하고 남에게 죄를 권유하기도 한다.

죄를 자꾸 심리적으로 해설하려는 유혹은 설교자에게 낯설지 않다. 죄는 심리적 사정보다는 우선 정치적 · 경제적 상황에서 생겨난다. 죄를 낳는 정치적 · 경제적 상황에 대해 교회와 신학의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경제적 빚의 비유를 등장시킨 오늘의 구절은 결국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의식한다. 인간과 하느님의 뒤틀린 관계를 하느님이 바로잡아 주시라는 기도겠다.

그런데 이런 반문도 생길 법하다. 하느님이 깔끔하게 참아주시면 간단히 풀릴 문제를, 하느님답지 않은 옹졸한 태도로 인간에게 용서의 조건을 내세운단 말인가. 인간의 죄로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간다면, 그럼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면 될 것 아니냐.

하느님은 참고 또 참아서 이미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남는다. 인간의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전에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린다. 인간의 죄로 생긴 인간 사이의 상처는 인간들끼리 따로 해결해야 한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와 관계없이, 인간 사이의 화해는 따로 이루어져야 한다. 살인자가 뉘우치거나 사죄해서, 그리고 하느님이 살인자의 회개를 듣고 용서한다고 해도, 피해자가 살아나거나 유가족의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회개나 용서가 원상회복을 가져오진 않는다. 죄의 여파와 영향력은 사라지는 것이 않는다. 그토록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에 대한 감각이 아주 무디어진 세상 같다. 갖가지 모습으로 존재하는 죄를 분별하기도 어렵고, 끔찍한 사건을 보고 듣는 것에도 지친 탓일까. 개인주의 풍조도 그런 무감각에 한 몫 한다. 개인의 죄를 사회로 돌리는 수법도 마찬가지다. 부자와 권력자의 죄에 대한 엄정하지 않은 법 집행 소식에 짜증난 탓일까. 용서를 남용하는 교회 관행 탓인가.

그런 세상에 오늘의 구절은 몇 가지를 가르쳐준다. 첫째, 인간의 죄는 하느님 탓이 아니라 인간의 탓이다. 둘째, 인간 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하느님은 바라신다. 셋째, 죄는 자신, 이웃, 교회, 세상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넷째, 인간은 자신의 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산다(원죄). 다섯째, 내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아도 내 죄의 영향력은 세상에 남아 있다. 여섯째, 하느님이 내 죄를 용서한다 해도 나는 내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 일곱째,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함부로 악용하지 말라. 여덟째, 보복이 아니라 용서라는 눈으로 죄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홉째,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짓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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