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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장영식, “‘결정적 순간’은 부르심 속에 있다”[인터뷰] 하느님의 부르심 따라 현장 향하는 장영식 사진작가

5월 22일 새벽 2시,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산에 올랐다. 공사 재개 소식을 들은 날부터 마음속에서 ‘가야한다’는 울림이 멈추지 않았다. 산에 올랐을 때,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힘없는 할머니들이 몇 배나 되는 수의 전경과 공기업 용역에 맞서 똥물을 퍼붓고 옷을 벗으며 극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전쟁터였다. 그는 분노와 울음을 삼키고 눈을 카메라 뷰파인더로 옮겼다. 손에 힘을 줘 셔터를 눌렀다.

이날 그가 찍은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의 사진은 울산, 부산, 창원, 서울 등을 순회하며 전시됐다. 흑백의 사진에 깊고 처절했던 그날의 울음소리를 담아낸 이는 사진작가 장영식 씨다.

그를 만난 건 오랜 장마가 잠시 숨을 고르던 어느 일요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였다.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탈핵 집회에 밀양 주민 400여 명이 참가한 날이었다. 장영식 작가는 먼저 도착해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간이 분향소 주변에서 촬영 중이었다. 비가 올 것에 대비해 완전 무장에 가까운 방수복장에, 그의 분신과 같은 카메라를 비닐커버로 잘 보호한 채 말이다. (이런 철저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그의 카메라는 울산 희망버스 때 현대자동차 사측이 쏜 물대포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 “사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라고 말하는 장영식 사진작가 ⓒ문양효숙 기자

“죽음과 삶 공존하는 하늘 아래 마지막 집… 가슴이 먹먹했어요”

장 작가가 처음 사진기를 잡은 건 초등학교 때였다. 그는 아버지가 선물한 니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즐거운 추억이라 했다. 하지만 추억의 카메라는 기차 여행 중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로는 카메라를 잡을 수 없었다.

다시 카메라를 잡은 것은 2년간의 짧은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무리한 후였다. 대학생 시절을 포함해 꼬박 10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와 시작한 교사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던 때였다. 그는 한 명의 교사로 거리에 나갔고, 교육 이념에 맞지 않는 학교의 결정에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학교의 ‘어른’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그는 교사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장 작가의 피사체는 가난한 동네와 소외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산복도로, 안창마을, 문현동 안동네, 아미동 등 부산의 오래된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마을 풍경과 성당, 그리고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슬픈 이웃에게 마음이 많이 갔죠. 예수의 관심이 머무는 곳, 예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그것이리라 생각했어요.”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그들의 삶을 맨살 그대로 보여주었다. 높은 담벼락도, 웅장한 대문도 없이 그저 죽음과 공존하는 삶의 풍경이었다. 그가 2004년에 찍은 사진 한 장에는 한 꼬마가 무덤 앞에서 혼자 놀고 있다.

“부산 서구 아미동 비탈길을 오르고 올라 만난 마지막 집이었어요. 이름이 한이였는데 일곱 살이었죠. 집앞 묘지에서 혼자 놀고 있었어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하늘 아래 마지막 집의 풍경에 가슴이 먹먹했어요. 저절로 ‘하느님…’ 했죠. 아이랑 앉아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고 내려오는데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헤어지느라 힘들었어요.”

   
▲ 2004년 부산 서구 아미동 산동네 꼭대기에서 찍은 사진. 일곱 살 아이가 무덤가에서 혼자 놀고 있다. (사진 제공 / 장영식)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만난 뒤…
누군가의 ‘동지’가 됐지만, 누군가로부터 ‘용공, 좌경’ 소리를 들었다

가난한 삶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담아내던 그의 눈이 달라진 것은 2011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올라갔던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이었다.

“주보를 보고 한진중공업 앞에서 수요미사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들이랑 한번 가보자 해서 미사가 있던 날 갔지요. 굉장히 충격 받았어요. 뉴스에서 1차 희망버스가 왔다는 걸 보긴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거든요.”

그날 집에 돌아온 그는 한진중공업 사건과 관련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데도 가지 않고 김진숙이 누구며, 김주익은 누구인지, 이 문제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언론의 보도와 자료를 찾아 읽었다.

“김 지도(김진숙 지도위원)가 2003년 11월 부산역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김주익 열사의 추도사를 낭독하던 동영상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봤어요. <소금꽃나무>도 읽었지요. ‘나는 누구인가. 왜 내가 부산에 살면서도 이런 일들을 전혀 몰랐는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휘몰아쳤어요.”

그는 카메라를 들고 크레인 앞을 향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른 지 200일이 되어 가던 한여름이었다. 그는 100일이 넘도록 매일 크레인 앞을 찾았다. 처음엔 누구인가 싶어 경계하던 한진 노동자들은 나중에 그에게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내주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내려오던 날, ‘동지’들은 그가 촬영할 수 있도록 방어벽을 만들어줬다.

3차 희망버스를 앞두고 그는 부산대학교에서 한진중공업 거리 전시회를 열었다. 사진전은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전시회는 한진 노동자들이 그를 ‘동지’로 받아들인 계기가 되었지만, 부산가톨릭사진작가협회 사람들로부터는 ‘용공, 좌경’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협회 회장이었던 그는 아무 미련 없이 회장직을 그만두고 협회를 탈퇴했다.

한진중공업을 겪으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변했다. 스스로 “더 치열하고 날카로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진 이전에 찍었던 사진을 정리했다. “‘과감하고 철저하게’ 사진을 새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진은 다 버렸어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진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됐죠. 그런 면에서 85호 크레인에게 늘 고맙죠.”

   
▲ 장영식 사진작가가 서울광장에서 열린 탈핵문화제에서 밀양 주민들을 촬영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사진은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법”

‘하나에 몰입하면 스스로 정리할 때까지는 못 놓는 성격’이라는 장 작가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후, 다시는 이런 사진을 안 찍을 줄 알았다”고 말했다. 너무 가슴 아팠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한진중공업 이후 현장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촉각이 곤두섰다.

“‘나에게 들어오는 세상’이 달라진 걸까요?”

“그랬던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어느 순간 달려가게 되고. 울산 현대자동차 최병승 · 천의봉 동지가 철탑에 올랐을 때도 바로 다음날 밤 10시에 갔어요. 기가 막히더라고요. 지금은 궁전이에요. 그땐 그냥 철탑 난간에 밧줄로 매달려있었어요. 부산에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그런 상황을 보니 저도 계속 가는 거죠.”

그는 현장에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한진중공업 수요미사에 갔던 것도, 밀양을 향했던 것도 모두 그런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밀양에서도 그 부르심을 느꼈다.

“작년 여름에 혼자 차를 타고 밀양 보라마을에 갔어요. 남들은 그냥 마을에 들어가는데 저는 마을 입구에서 내려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아스팔트길이었는데 뭐랄까, 그냥 땅이 아닌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사진도 찍고, 손으로 만져도 보고 그랬죠. 지나가는 어르신이 ‘뭐하요?’ 하고 물어보셔서 ‘사진작가인데 이제야 왔습니다’ 했더니 ‘거가 이치우 어르신 돌아가신 자리요’라고 하시더군요.”

   
▲ 밀양 보라마을, 이치우 어르신이 돌아가신 자리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주민 이치우 어르신은 2012년 1월 16일, 이 자리에서 분신해 세상을 떠났다. (사진 제공 / 장영식)

그런 부르심 때문일까. 그는 밀양 현장의 사진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아무 조건 없이 보냈다. 밀양 사진으로 한 달 내내 전시회를 열고 여기저기 그의 사진이 실렸음에도 원고료는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작품 값은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엄격할 필요가 있어요. 제 사진을 필요로 하는 곳이 상업적이면 저도 철저히 받죠. 하지만 한진중공업을 경험하며 만나기 시작한 곳들은 모두 엄청 가난해요. 아낌없이 줘야 할 곳이라면 아낌없이 줘야죠.”

가난한 길을 선택해서 걷고 있지만 그는 지금 걷는 길이 행복하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연대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가족들은 간혹 이런 그의 삶을 애틋하게 보기도 한다.

“아내가 저보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살려고 하냐고 하죠. 요 몇 년 사이에 십년은 늙어 보인다고. 집에 돌아와서 잘 때 완전히 정신없이 곯아떨어진대요, 제가. 그게 애처로운가 봐요.”

장영식 작가에게 앞으로 사진에 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다.

“사진에 욕심은 전혀 없어요. 다만, 좋은 날이 오면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싶긴 하죠. 철탑도, 종탑도, 송전탑도 모두 빨리 잘 해결되어서 더 이상 이런 가슴 아픈 현장 사진을 안 찍어도 되면 좋겠어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 소소한 일상은 물 건너간 것 같긴 하지만요.”

   
▲ 장영식 사진작가가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간이 분향소를 촬영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현장을 향했다. 그는 천천히 걸으면서, 그리고 머물러 바라보면서 대한문 앞과 밀양 어르신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인들이 많을 법한 현장이었음에도 그는 집회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와 느슨하게 대화를 나누지도, 잠시 시선을 거둬 쉬지도 않았다. 그는 온전히 ‘현장’에 집중하고 있었다.

찰나의 거장으로 불리며 보도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그의 책 <결정적 순간>에서 “나는 언제나 긴장감으로 거리를 쏘다니며 삶의 현장을 올가미로 잡아 보전하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의 모든 본질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하기를 바랐다”고 썼다. 그는 대상을 따라갔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간디가 암살당하던 때에 그가 인도에 있었던 것도, 중국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기 직전에 중국에 있었던 것도,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저 행운이 아니다.

장영식 작가의 ‘결정적 순간’은 부르심 속에 있다. “나에게 사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에게 울림이 있는 현장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낀다. 그곳으로 달려가 오랜 시간 머물고 기다리며 결정적 순간을 담아낸다. 부르심에 응답했으니 “내 카메라에 잡힌 순간이지만, 내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사진은 눈과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찍는 것이라 말했던가. 때로는 울음을 삼키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셔터를 누른다는 장영식 작가의 사진에는 그의 것인지, 노동자와 할매들의 것인지 모를 슬픔과 분노가 묵직하게 배어난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창조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이지요. 그러니 그것이 파괴된다면, 그 존엄성이 무시된다면 저항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느님이 부르시고, 제게는 저항의 방법이 사진이죠. 그러니 사진은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에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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