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3

“오늘 우리에게 내일을 위한 먹을 것을 주십시오.” (마태 6,11)

오늘의 구절은 예나 지금이나 해석하기 어렵다. 흔히 빵, 양식, 먹을 것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epiousios)는 5세기 어느 파피루스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면 문헌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단어다. 예수 당시 사용된 단어가 아닌 것 같다. 예수의 기도는 원래 아람어로 말해졌다. 이 단어를 아람어로 거꾸로 번역해보면 다양한 뜻이 나타나서 해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피(epi)와 우시아(ousia / Substanz)에서 어원적으로 유추하면 ‘우리 존재(Substanz)와 하나 되는’(Origenes),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super-substantialis, Hieronymus) 정도의 뜻이다. 초대교회 신학자들과 중세 성서학자들은 미사에서 영성체 직전 예수의 기도에서 이 단어를 언제나 성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설하였다. 특히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Vulgata) 예로니무스가 그 단어를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super-substialis)으로 표현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단어를 성사적(聖事的)으로 축소하면서 신자들에게 매일 영성체하도록 강조되었다. 오늘의 구절에 근거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빵과 포도주 두 가지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평신도는 미사 중 성혈(聖血)을 영할 수 없다는 결정이 생겼다.

▲ ‘주님의 기도’,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6)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예수 이후 그리스도론, 미사 이해, 존재(Substanz) 이해를 전제로 하기에 오늘의 본문 해설에 적합하지 않다. 예수 이후 생긴 주장을 예수에게 강제로 선물할 수는 없다. 루터는 불가타(대중 라틴어 성서)를 포기했기에 이런 해석을 반대했다. 번역된 단어 하나로 역사가 이렇게 달라지기도 한다.

또 다른 어원적 문제는 에피나이(epienai : 다가오다), 히 에피우사(he epiousa : 다가오는 날)와 얽혀 있다. ‘오늘, 내일, 매일, 영원히’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요약한다면, 가장 유력한 해석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유다 사회에서 내일은 종교적 의미에서 해질 때부터 시작되지만, 실생활에서 해 뜰 때부터 아침이 시작된다고 보통 생각하였다. 내일 먹을 식량을 간청한다는 것은 오늘 저녁 식량을 걱정하지 않고 편히 잠자고 싶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기도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마태 6,34)가 이 해석과 반대되어 자주 등장하였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신뢰와 빵에 대한 애타는 인간적 소망이 모순되지는 않는다.

초대교회에서 발견되는 가장 놀랍고 경탄할 일은 그들이 예수를 기억하는 유일한 규칙적 모임이 바로 식사였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식사가 그리스도교에서 제일이며 최고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선사한 새로운 모습이다. 기도, 금식, 참선, 묵상, 고행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을 나누는 식사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 놀라운 모범은 그 후 전례(성례전)가 의식(ceremony)으로 변하면서 차차 약화되고 무시되었다. 오늘 미사나 예배에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조되고 유지되는지 의문스럽다.

오늘의 구절을 성사론적으로 축소하고 강조하는 흐름이 교회 안에 있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또 다른 흐름도 있다. 세상의 가난 문제와 가난한 사람들 문제에 주목하는 흐름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구절이 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마르 6,37).

오늘의 구절은 내일 먹을 식량을 걱정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그들은 아직 먹을 빵이 없다. 그들은 빵 이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빵을 걱정해야 한다.

오늘의 구절은 ‘가난한 사람’, ‘그리스도교의 가난’, ‘성직자와 목회자의 가난’ 문제 등 여러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상황이 인식을 결정한다’는 말이 오늘의 구절처럼 생생하게 나타나는 구절이 성서에 또 있을까. 내일 먹을 빵뿐 아니라 평생, 아니 대대손손 먹을 것까지 미리 마련하거나 준비한 사람들에게 오늘의 구절은 어떻게 들릴까.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의 구절을 기도할 때 어떤 심정일까. 평생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오늘의 구절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 안락함과 명예를 누리는 ‘책상물림 신학자’(Schreibtisch-theologen)들은 또 어떨까. 성서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주로 먹고 살만한 지역에서 확장해온 역사가 신학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오기도 한다.

신자들이 성서를 읽을 의무가 있다고 만일 그리스도교가 가르쳤다면 인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가톨릭교회가 성서 자국어 번역에 일찍 앞장섰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펼쳐졌을까. 서양 역사에서 유다인 중에 문맹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그리스도교인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유다교는 성서 공부를 기도처럼 의무라고 가르쳤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 루터 시대까지 성서는 사실상 성직자의 독점 소유였다. 종교 정보의 독점은 종교 권력의 독점을 가져온다. 오늘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들에 대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유효한가.

우리 시대에 성서 공부가 또 다른 문제다. 모국어로 성서를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성서 교육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 같지 않다. 가톨릭은 성서 교육을 제일 의무로 여기지도 않고,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이다. 개신교는 성서 교육에 열심이지만 대부분 성서학 연구 성과를 외면한 채 성서를 가르치는 형편이다. 성서를 읽지 못한 옛 시대가 있었고, 성서를 잘 모르거나 잘못 가르치는 오늘의 시대도 있다. 도대체 그리스도교는 왜 그럴까. 모든 신자들이 성서학자들 수준으로 성서를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그런 날이 올까.

오늘의 구절을 기도할 때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겠다. 유명한 해방신학자인 내 스승 소브리노(Sobrino)는 나와 헤어질 때 이렇게 부탁하였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세요(No olvide los pobres en el mundo).”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가 내게 있었다.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어서 미안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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