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7]

예수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분은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유대인 성서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예수는 새로운 신학을 제공하지도 않았고, 랍비 혹은 율사들이 하듯이, 하느님에 대해 묘사하고 정의하려 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중요 관심사는 예언자들의 것과 비슷하다. 그분은 그 시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과 같이 성서를 세밀히 해석하지도 않았고, 묵시문학적 분파가 하듯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전통을 잇는 분으로 보인다. 예수는 고대 예언자들이 하듯이 백성을 위한 정열에 불타면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공간으로 일상생활에 주목한다. 예수는 하느님을 성전 혹은 기적과 같은 일상생활을 벗어난 장소나 일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기 위해서, 예수는 인간 실존이 그 본연의 상징 세계, 곧 놀이를 되찾아

▲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 틴토레토의 작품(1578)
야 한다고 믿었다. 상징(象徵)은 주체들 간의 이타성(異他性)을 전제하며 자유로운 투신(投身)을 유도하는 사건이나 사물을 의미한다.

인간 실존은 율법서의 문자들 안에서, 혹은 종말에 대한 조급한 마음이 그려내는 피안(彼岸)에 대한 다채로운 꿈에서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삶 안에서 그 놀이를 갱신하여 진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상징성 혹은 놀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신앙을 위한 실천의 획일성을 피하고, 각자가 자유롭게 깨달은 만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인간 세계가 지닌 인간다운 풍요로움이기도 하다.

예수에게는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 절대적 조건이었다.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하느님 본연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의미를 지녀야 한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탈출 33,18-23 참조)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다. 이 선포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선택을 요구한다.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요한에게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은 심판이 다가 왔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이 갱신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 그 함께 계심이 하느님의 나라이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할 때,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추상적이 아니고, 실효성 있는 것으로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우리의 삶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어떤 흐름이 있는가

우리 역사의 모든 순간과 우리 삶의 모든 형태는 하느님과 관련지어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성공과 불행, 나눔과 불의함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고려할 수 있다. 어떤 불행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느님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 불행을 자기에게 주어진 저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장애아를 가진 어떤 부모의 기도가 있어 소개한다.

“주님, 이 아이를 제가 지은 죄의 결과라고, 저의 탓이라고 생각지 말게 하시고 당신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로 생각해서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어 당신 뜻에 맞게 양육하게 해 주십시오.

이 아이의 부족함에 대하여 절망하게 하지 마시고, 아이가 가진 그 자체를 인정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아이가 가진 모든 능력이 드러내어지고, 나타날 수 있도록 저를 그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아이를 저보다 먼저 하느님 곁으로 데려가 달라는 기도를 멈추게 하시고, 온전히 당신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 주십시오.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그 오만한 생각을 접게 하여 주십시오.

건강하게 자라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여 비탄에 젖게 하지 마시고 진정으로 그 아이들의 건강함에 대하여 기뻐할 수 있는 온유함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이의 장애가 제 인생 전부를 지배하여, 그 막막함에 저의 온 생애를 허비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또 다른 세계에 눈뜨는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장애를 가진 자녀를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배려에 너무 익숙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제가 겪는 고통으로 인하여 다른 이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제가 넘어질 때마다 저와 함께 넘어져 눈물짓는 당신을 보게 해 주십시오. 손 내미는 당신을 뿌리치지 않게 하시고, 바라보는 당신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는 너무 멀고, 힘든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헛된 길이 되지 않고, 그저 서러움으로 끝나는 길이 되지 않고, 당신을 향하여 가는 거룩한 길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자녀의 십자가 안에서 당신을 더 뚜렷이 더 가까이 볼 수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통하지 않은 행복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당신께서 이 아이를 통하여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복음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초래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들을 보여 준다. 예수는 그 가능성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분은 예언자이면서 우리의 삶이 지닌 상징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다. 예수는 우리가 변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전혀 계발되지 않고, 무시되고 약화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낮은 자리에 앉아라”(루카 14,7-11),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라”(14,12-14) 등의 말씀은 우리의 통념을 깨고, 우리의 삶이 지닌 상징성을 살려 실천하라는 말씀들이다.

하느님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우리의 실존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삶 안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어떤 흐름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아무런 변화의 조짐이 없으면 변화가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 변화가 보이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가 보고, 행동한 방식이다.

예수가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는 기성 제도와 질서의 타성에 젖어 살지도 않았고, 그것을 경건한 종교적 단어로 다시 포장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중요한 문제들 앞에 삶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 안에 참다운 농도를 지니도록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