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2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마태 6,10ㄴ)

무엇이 ‘아버지의 뜻’인가. 보통 두 가지로 구분한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갑니다”(마태 7,21)―하느님 뜻의 윤리적 차원으로 주로 인용된다. 인간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지침이다.

하느님 뜻의 구원사적 차원에서 마태오 복음 18,14를 떠올릴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께서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나타낸다.

하느님의 뜻은 두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두 가지 도움으로 공동성서(구약성서)의 십계명과 예수의 기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의 기도에 의해 십계명이 극복되었다거나 십계명을 낡은 계명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 ‘주님의 기도’,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6)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는 무슨 말일까.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인가. 하느님이 당신 뜻을 인간 곁에서 펼쳐보시라는 부탁인가. 마태오 복음 6,33은 하느님 나라에 의로움(dikaiosyne)를 끼워 넣었다.

더 중요한 구절은 겟세마니 언덕에서 체포 직전 예수의 기도인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42)이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대로 되길 빌지만 동시에 하느님 뜻에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다짐이다. 하느님 뜻은 인간의 동참을 요구한다는 생각은 유다교 사상에 깊이 뿌리내렸다. 양자택일은 역시 불가능하다.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인 동시에 인간의 애씀을 다짐하는 기도겠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구절은 ‘땅에서도’를 더 의식하는 말이다. 하늘은 하느님을, 땅은 인간 세상을 가리키는 비유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첫째, 땅의 기준이 하늘이다. 땅의 기준은 땅이 아니다. 둘째, 땅에서 아직 하느님 뜻이 존중되지 않았다. 땅의 잘못된 질서를 바꾸어야 한다. 셋째, 예수는 땅에 나타난 하늘이다.

땅이 땅의 기준이라면 겨우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인간의 최대 기준이 되겠다. 자본주의나 맑시즘이 인간을 구출할 수 있을까. 인간이 천사 같지만 또한 악마 같기도 하다는 체험은 상식이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느님 없는 인간 세계는 외롭고 무기력하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교만이다.

자연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도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멀다. 자연은 인간을 책임지지 못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책임진다―창조사상의 핵심이다. 자연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무한책임을 느끼고 있다.

아직 땅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것이 활약한다’는 현실이 더 큰 문제다. 교회가 아직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것이 날뛰는 현실이 더 큰 문제다. 그리스도교의 잘못에 대한 반항으로 생긴 무신론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팔아먹는 우상숭배가 더 큰 문제다.

잘못된 세상 질서를 알아내고 그 행태를 파악하며 고쳐나가는 책임이 그리스도교에 주어졌다. 하느님은 행동하는 그리스도교를 요구하신다. 그러려면 우선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로마 2,16).

하느님의 뜻은 예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요한 4,34). 예수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기 위해”(시편 40,7-9; 히브 10,7) 세상에 오셨다.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마태 26,39) 예수는 살았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예수를 ‘하늘’이라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적절히 표현했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마치 하느님 뜻으로 위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국민의 뜻이라며 거짓말하는 정치인도 많고, 하느님의 뜻 운운하며 거짓말하는 종교인도 많다.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가. 돈, 권력, 명예를 얻으려 예수를 파는 장사꾼들은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기다리시라.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노력에서 현대 학문과 사상의 선구자들에게 그리스도교는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앎이 상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앎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이미 신학에서 정착되었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에 준 건전한 충격을 그리스도교는 잊지 않고 있다. 세상 개혁보다 먼저 그리스도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해방신학의 주장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현재 그리스도교의 몰골로는 감히 세상을 꾸짖을 면목도, 자신도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에 별로 공헌하지 못한 그리스도교의 부끄러움은 여전히 크다. 그리스도교는 우선 자신의 역사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세상 개혁에 공헌하지는 못할망정 세상 개혁을 가로막으면 되겠는가. 그리스도교를 주로 개인윤리 차원으로 해설하는 설교가 넘친다. 아직 그런 설교자들은 신학적으로 철이 덜 들었다는 증거다.

산이 이미 존재하기에 비로소 산에 오른다. 내가 산에 다가서기 이전에 산은 이미 내게 다가온다. 마치 하느님이 없는 듯 최선을 다하고, 그러나 하느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다.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 나 있이 나를 구원하신다. 나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나 없는 세상을 하느님은 통곡하신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지만 바로 나를 직접 창조하셨다.

인간의 자립과 하느님에 대한 의지는 반비례가 아니라 정비례 관계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야 인간의 자립을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할수록 인간은 더 자립적이 된다. 피부 밖으로도 탈출하지 못하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 밖으로 탈출할 수 있을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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