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21]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눈부신 조명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내부를 관람하다가 다시 만난 가톨릭 순례자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얼핏 이탈리아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그는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도 실은 나를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매번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메모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어서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누군가 나의 행위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신경질적으로 ‘뭣 땜에?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보자 그는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손가락을 들어 시타델 서쪽 전망대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카이로 시내와 기자의 피라미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앞에 한 쌍의 유쾌한 아랍 커플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손을 높이 흔들어 보이면서 당장 사진부터 찍어달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술탄 하산 모스크(Sultan Hassan Mosque)와 리파이 모스크(Rifai Mosque)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생각해보니, 검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바로 이탈리아 순례자들에게 올드 카이로를 안내해주던 이집트 가이드였다. 올드 카이로 유적지를 안내할 때는 아랍 전통복장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평범한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독실한 콥트교도인 그는 타인에게는 몹시 관대했으나 자기 자신에게만은 매우 엄격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헬리오폴리스 지역 순례를 마치고 카이로 시내로 되돌아온 그들은 우연히 나를 다시 만났으면 하는 기대를 안고 시타델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왜? 무엇 때문에 나를 다시 만나려고 했느냐”고 묻자 그는 “당신에게 한 가지 시정해 둘 문제가 있어서다”라고 대답했다.

▲ 카이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타델 서쪽 전망대 ⓒ수해

13세기 맘루크 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술탄 하산 모스크와 역사에 외면당한 비운의 인물들이 대거 잠들어 있는 리파이 모스크를 둘러보고 나자, 우리는 함께 근처의 이슬람 식당으로 향했다. 간단한 음식과 레몬주스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이집트 가이드가 나에게 들려준 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실은 어제 올드 카이로에서, 한때 콥트교 교황청이 있던 알 무알라카 성당을 설명할 때 한 가지 실수한 점이 있었다. 순교자 성 마르코의 유해에 관하여 설명할 때 그의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성 마르코 기념성당에 각각 따로 안치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확실한 전거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성 마르코의 유해는 오랫동안 이탈리아로 밀반출되었다가 이집트로 반환되자 현재의 카이로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 성당에는 상징적인 의미의 가묘(假墓)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이집트 가이드들은 알면서도 성 마르코의 순교를 한층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다고 설명하는 버릇이 있다. 혹시라도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그 점을 시정하고 싶었다.”

독실한 콥트교도인 이집트 가이드와는 달리 순박한 미소가 인상적인 그의 아내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별다른 종교적인 갈등이나 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최근 완고했던 무슬림 세계에 나타나는 변화의 기류를 적나라하게 대변해주는 건, 비단 이들 부부의 결혼뿐만이 아니다. 거리마다 십자가와 초승달이 나란히 공존하는 의미심장한 벽화가 공공연히 등장하고 있었다.

성 마르코의 무덤에 관한 이집트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자, 옆에서 묵묵히 우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안드레아 보첼리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담담한 어조로 들려주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자기소개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 거주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였다. 그래서 평소 ‘지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박물관’으로 알려진 바티칸 박물관(Vatican Museum)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라고 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와 같은 르네상스 최고 작가들의 걸작이 대거 전시되어 있는 바티칸 박물관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 런던 영국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안드레아 보첼리가 즐겨 감상하는 작품은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중앙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이었다.

구약과 신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부터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과 최후의 심판 장면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놓은 이 그림들은 시스티나 예배당을 빛나게 만드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서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수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혼이 담긴 성화를 감상하기 위해 시스타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쳐야만 한다. 성 베드로 광장은 1656년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거장 베르니니가 설계하여 1667년에 완공하였다.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형 꼴을 이루는 광장은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루며, 광장의 정면 끝은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해당한다.

반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4열의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스양식 원주 284개와 각주 88개가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테라스 위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이 조각되어 있고, 회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는 이 광장 중앙에는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는 오벨리스크 한 기가 우뚝 서 있다. 높이 25.5미터에 무게 320톤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서기 40년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 서기 37~41년 재위)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전리품이다. 원래 칼리굴라 황제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로마로 옮겨온 이 오벨리스크는, 1586년 경기장에서 임종한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알렉산데르 7세 가문의 문장과 대형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 인 빈콜리 성당에 안치된 미켈란젤로의 조상(彫像) ‘모세’와 십자가를 머리에 얹고 서 있는 성 베드로 광장의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면서 성장기를 보낸 안드레아 보첼리의 가슴 속에는 오래 전부터 은밀히 간직해온 한 가지 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모세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가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막연히 동경해 오던 관념을 구체적인 현실로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화 가운데 그동안 그가 이 여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 위해 바친 열정과 노고가 충분히 전해져 왔다.

▲ 카이로 연안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며 흐르는 나일 강 ⓒ수해

이집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안드레아 보첼리를 위해 이집트 영어 가이드 부부는 지금부터 시나이 반도까지 그와 동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이드 겸 운전기사와 취사반장 역할을 동시에 맡은 정직한 콥트교도는 나에게도 동행을 권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순례 여정에서 상대방의 감성을 잘 모르면서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는 것은 쉽사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 경우에는 대부분 후회막심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선 오늘 하루 동안 카이로 지역을 함께 다녀보고 저녁 때 결정하자고. 나는 막연히 고속버스를 이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안드레아 보첼리의 캠핑카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집트 가이드 부부는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고급 캠핑카를 마다하고 구태여 번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암튼 그건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 하루를 같이 움직여보기로 합의한 우리는 강가로 나가서 작은 나룻배를 한 척 빌렸다.

삐그덕 삐그덕~. 낡은 노를 저으며 유유히 흐르는 나일 강을 따라 가노라니 야생 물오리 떼가 부산하게 나는 강변에는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빨래를 핑계로 갑갑한 히잡을 벗어던지고 물속에 풍덩 뛰어들어 자유롭게 헤엄치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강변을 따라서 나룻배를 한참 노 저어가자, 드디어 오늘의 주요목적지인 로다(Roda) 섬의 나일로 미터(Nilometer, 나일강의 수위 측정기)가 보였다.

나일 강 서안과 로다 섬 동안 사이로 흐르는 급류를 따라가다가 나룻배를 선착장에 정박시켜 놓고 섬으로 올라서자, 맨 먼저 섬의 남쪽 끝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튀르크 양식의 원뿔형 지붕이 시야에 들어왔다. 현존하는 이집트 나일로 미터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이 나일로 미터는 서기 861년 압바스 왕조 때 건축되었다. 설계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가 맡았다.

지반이 암반과 충적토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일 강의 수위에 따라 면적이 수시로 변하는 로다 섬은 고대 파라오 시대부터 항구, 조선소, 요새, 왕궁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중세 이후의 건축물뿐이었다.

▲ 로다 섬의 나일로 미터와 모나스테르리 다리 ⓒ수해

이집트 전역을 가로지르며 지중해로 흘러가는 나일 강은 6월에서 9월 사이에 상류의 에티오피아 고산지대로부터 흘러오는 급류성 강우로 인해 강둑을 넘어 범람한다. 9월에서 10월 사이에 범람이 그치고 나면, 상류에서 떠내려 온 토사로 인해 비옥해진 충적토는 농경지로 활용된다. 따라서 고대 파라오 시대부터 나일 강의 범람 정도를 측정해 한 해의 농사와 수확을 예측하는 일은 전 국민의 사활(死活)이 달린 문제였다.

티켓을 끊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중앙에 20미터 높이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기둥 주위에는 좌우로 수위 측정을 위한 나선형의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수위를 측정하는 단위는 큐빗(cubit)이었다.

(* 큐빗 :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썼던 길이의 단위. 1큐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로, 약 18인치, 곧 45.72㎝에 해당한다. 현재의 야드, 피트의 바탕이 되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수위는 16큐빗이었다.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나일로 미터의 수위가 16큐핏에 이를 때가 가장 수확이 좋으며, 그 이상이면 홍수, 이하면 가뭄으로 예측했다고 한다.

일전에 아스완의 엘레판티네 섬과 아기르키아 섬의 이시스 신전에서 보았던 계단식 나일로 미터와는 달리 원통형 돌기둥과 나선형 계단으로 수위를 측정하는 로다 섬의 나일로 미터 건물은 매우 독특했다. 특히나 원뿔형 지붕 아래 설치된 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태양광선은 천장의 정교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어우러져서 시시각각 색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일로 미터 내부를 관람하고 밖으로 나오자 호스를 들고 정원에 물을 뿌리던 정원사가 바가지에 찬물을 한 바가지 떠서 건네며 큰소리로 외쳤다. “한번 나일 강물을 마신 자는 반드시 다시 이집트에 되돌아온다”는 정원사의 말에 따라 우리는 서로 경쟁적으로 나일 강물을 한 바가지씩 들이마시고, 인근의 움 칼툼 박물관(Umm Kulthum Museum)으로 걸음을 옮겼다.

20세기 아랍이 배출한 전설적인 여가수 움 칼툼은 1900년 카이로 북동쪽 만수라에서 태어났다. 아랍어로 동방의 별을 의미하는 ‘카우카브 엘 샤르크’ 혹은 ‘아랍 민중의 목소리’로 유명한 움 칼툼은 어려서 이맘(Imām, 이슬람교의 예배인도자)인 아버지의 지도로 아랍 음악의 거장인 작곡가 모하메드 엘 카사브기를 만나 고전 음악을 배웠다. 그 뒤 무대와 영화 등을 통해 대중을 만나면서 점차 그녀는 ‘음악을 통해 슬픔을 끌어안는 아랍의 어머니’로 변모해갔다.

1932년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순회공연에 나선 그녀의 호소력 짙고 힘 있는 목소리는 아랍권 전역을 열광시켰다. 특히나 2차 세계대전 뒤 이스라엘이 건국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고 아랍 전역이 슬픔과 분노에 잠겼을 때, 그녀의 노래는 상심한 아랍인들의 마음을 한없이 위무해 줬다.

한때 움 칼툼은 나세르 혁명 이후 옛 왕실을 위해 노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왕정을 무너뜨리고 출범한 혁명정부는 신속히 그녀의 노래를 방송금지 처분했다. 그러자 움 칼툼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세르 대통령이 “그대들은 이집트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싶은가”라며 즉각 움 칼툼 노래의 방송금지를 무효화시켰다는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일화이다.

▲ 타흐리르 광장의 저녁노을 ⓒ수해

움 칼툼 박물관과 마니알 궁전 박물관(Manyal Palace Museum)을 둘러보고 난 후, 로다 섬과 올드 카이로를 연결하는 프랑스풍의 낡은 목제 다리인 모나스테르리 다리를 건너,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Egyptian Archaeology Museum)이 자리한 뉴 카이로 지역으로 향했다.

장구한 이집트 오천년의 역사가 총망라되어있는 고고학 박물관에서 특별히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물은 로제타 석비(Rosetta Stele)와 메르넵타 석비(Merneptah Stele)였다.

고대에 나일 강과 지중해가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요충지였던 로제타는 인근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된 이후로는 그 중요성이 현저히 떨어진 한적한 어촌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한때 저 유명한 로제타 석비가 발견됨으로써 일약 전 세계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의미심장한 장소다.

아랍어로 라쉬드(Rashid)라고 불리는 로제타에서는 1799년 8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포병사관 피에르 부샤르에 의해 흑색 현무암의 비석조각 하나가 발견되었다. 가로 72센티미터, 높이 114센티미터, 두께 30센티미터의 로제타 석비에는, 고대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상형문자), 데모틱(Demotic, 히에로글리프를 쓰기 쉽게 만든 고대 이집트의 민중문자), 그리스문자 등 세 종류의 문자를 사용하여,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소상하게 새겨져 있다.

영국의 이집트 학자 토머스 영과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샹폴리옹의 치열한 연구결과에 의해 고대 이집트학의 실마리를 푸는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이 로제타 석비의 원본은, 1801년 아부키르 전투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가 평화조약 대가로 영국에 넘겨버리는 바람에 현재 런던의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원본을 전리품으로 빼앗겨 버린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레코-로만 박물관, 로제타의 줄리앙 요새, 카이로의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세 군데에 사본이 각각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문헌상 이스라엘의 존재를 최초로 증언하고 있는 메르넵타 석비와 로제타 석비 모사본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 고고학 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어느 고층빌딩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 건물의 옥상에 오르자 고고학 박물관 서쪽에 자리한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이 시야에 들어왔다.

1952년, 아랍어로 ‘해방’을 의미하는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당시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 왕국을 14명의 장교들이 무너뜨린다. 그 후 파루크 1세(Farouk I, 1936~1952년 재위)를 마지막으로, 왕정을 무너뜨린 군사 혁명 위원회의 주체였던 열네 명의 장교 중 세 명이 순차적으로 대통령이 된다.

이집트 초대 대통령 나기브와 나세르에 이어 1981년부터 집권한 무바라크의 장기집권은, 지난 2011년 2월 12일 바로 저 타흐리르 광장에서 30년간의 독재체제에 종식을 고하고 실각(失脚)했다. 그야말로 일찍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시니컬한 음성으로 토로했던 “길들고 노예화된 농부 같은 자연을 닮은 이집트 민중들”이 목숨을 담보로 성사시킨 혁명이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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