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1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마태 6,10ㄱ)

마태오 복음 6,9에 나타난 예수의 첫 번째 기도는 하느님 이름에 대한 거룩함을 주제로 삼았다. 그 거룩함은 하느님 나라와 관계된다는 것이 오늘 두 번째 기도의 뜻이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으십시오”(마태 6,33).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는 유다인의 기도에서도 자주 간청되었다. 회당 예배의 설교 마지막에 하는 카디쉬(Qaddisch) 기도의 두 번째 구절이다. “너희가 사는 동안, 너희의 날에, 이스라엘 모든 집이 살아있는 가까운 시간에, 그가 그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스라엘 집안과 다윗 왕국이 언급되지 않는 점에서 예수의 기도는 카디쉬 기도와 다르다. 국가적 · 정치적 의미를 벗어나 모든 민족에게 향하는 보편성을 띠는 예수의 기도다. 이스라엘 민족의 열망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을 인류에게 넓힌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면 구원이 완성되고 사탄의 나라가 완전히 끝장나며 “하느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스리시게 될 것”이다(1코린 15,28).

▲ ‘주님의 기도’,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6)
예수의 기도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서둘러 오도록 재촉하지 않고 오는 시점을 고정시키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자세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는데, 우리는 자주 하느님을 우리 기도를 받아 적는 비서처럼 여기기도 한다.

예수의 기도는 특이하게도 아주 짧다. 가난한 사람들이 외우기 쉽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예수는 짧은 기도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느님 나라는 예수 메시지의 핵심이다. 하느님 나라를 개념적으로 정의한 적 없는 예수는 이적과 말씀과 행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사례를 보여준다. 예수는 인식론이나 논리학에 특별한 관심이나 재능을 보여주진 않았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는데 예수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숨겨진 채 현실로 존재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나라의 다가옴에 무슨 역할을 하는가? 우리의 사소한 듯 보이는 좋은 말과 행동에서도 하느님 나라는 이미 존재한다. 신약성서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Vulgata)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adveniat regnum tuum)로 예수 기도의 이러한 성격을 잘 강조하였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 전통은 말씀 선포, 성사(성례전), 기도, 선교에서 하느님 나라가 나타난다고 해설하였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발간된 본당 신부를 위한 ‘로마 교리서’에는 하느님 나라를 교회와 ‘일치’시키는 안타까운 실수가 나타난다(… regnum Christi, quod est ecclesia).

공동성서(구약성서)에 나타난 솔로몬 이야기를 오늘 구절에 비추어보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난 하느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하고 그에게 묻는다.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선과 악을 구분하기 위한 ‘듣는 마음’을 청한다.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비는 솔로몬의 자세가 담긴 간청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답변하신다. “네가 장수(長壽)나 부귀영화나 원수 갚기를 청하지 않고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는 머리를 달라고 하니, 네 말대로 해 주리라” 말씀하신다(1열왕 3,9).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취임 연설에서 그런 ‘듣는 마음’을 하느님께, 그리고 백성들에게 간청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현대인은 우선 자기 자신을 찾으려 애쓰지만, 예수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자기 자신을 찾다 보니 하느님 나라를 찾은 사람도 있고, 하느님 나라를 찾다보니 자기 자신을 찾은 사람도 있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도 하느님 나라를 찾는 것은―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아주 중요하다.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인간 존재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돈이 인생의 기준인 사람도 있듯이 하느님 나라가 삶의 기준인 사람도 있다. 우리 삶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겨우 돈인가. 겨우 권력인가. 그까짓 명예인가. 우리가 바라는 나라를 빌지 않고 ‘당신 나라가 오소서’라고 빌도록 예수는 가르친다.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빌면 잘못된 욕심은 설 곳이 없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잘못된 세상 질서에 대한 하느님의 ‘대조 질서’(Kontrast-Ordnung)이다. 인간이 만든 의롭지 못한 세상 질서를 하느님이 심판하신다는 경고다. 정치인이나 백성들이나 현세 질서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성서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돈과 권력의 횡포에 맛들인 정치인이나 부자에게 하느님 나라는 정말로 무서운 경고다. 돈과 권력의 횡포에 시달리고 지친 가난한 백성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고마운 위로다.

총칼 앞에 무력하게 보이는 기도는 사실 총칼보다 힘이 세다. 돈 앞에 허무하게 보이는 기도는 사실 돈보다 더 값어치 있다. 기도는 도피처가 아니라 행동의 전제다. 기도는 이미 행동이다. 사람 마음을 바꾸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법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람을 바꾸어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말한다(Wer bettet, der ist nie allein).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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