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판 신부와 아시아 신학 나머지 이야기(3)


올해 두 번째로 연 <가톨릭사회포럼>에서 피터 판 신부에게 특강을 부탁했던 터라 우리는 포럼 장소인 강화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선 인천교구 신학교부터 들렀다. 판 신부는 신학교 부지와 건물 크기에 놀라면서 학생수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는다. “한 200명쯤 생활할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 정도 학생이 쓰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면서 그는 “이렇게 큰 신학교가 왜 이런 한적한 시골에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지역사회에 개방하여 나누면 훌륭한 공간이 될 텐데...”하면서 도시에도 이 정도의 시설과 부지는 찾기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이내 만난 이석재 총장은 내가 대학생 시절 연합회 활동을 할 때 지도신부를 맡은 적이 있어서 얼굴이 익었다. 합리적이고도 겸손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척 깐깐한(?) 분이셨는데, 수행의 흔적인가 얼굴에는 겸손함과 온화함만이 남은 듯했다. “남북통일을 바라고 북한의 복음화를 염원하면서 북쪽과 가까운 이 강화도에 신학교를 짓게 됐다”고 이석재 신부가 설명하자 판 신부는 “아,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다”고 감동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게 “그런데 북한 복음화는 북한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해야만 하는 거냐”고 은근하게 묻는다. 그 능청스러움에 “픽” 웃음이 나왔다.

판 신부와 만날 때마다 나는 그의 신학사상을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이런저런 질문을 계속 해댔다. 그날 전등사에 갔을 때, 한참 낮이었고 하늘은 더 없이 푸르렀다. 그가 스스로를 포괄주의(inclusivism) 범주에 한정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말해 보았다. “한국인들에게는 ‘하늘’이 하느님이다. 하늘을 의인화하여 하느님이라 부르는데, 영어의 갓(God)과는 어원이 다르다. 저토록 푸른 하늘에 잠겨 있을 때, 그 하늘이 우리 콧속으로 들어와 우리가 하느님을 호흡할 때, 모두 하느님의 품안에 있고 우리는 하나다.” 그러자 곧바로 판 신부가 말을 받았다. “그런 하늘을 숨 쉬어도 우리는 다 다르다. 여기는 불교사원이고 이 많은 사람들은 불자다. 그럼 이들이 그런 하늘 아래 함께 있다고 하여 우리 천주교인과 같은 종교적 정서를 갖는다는 말인가?”

나는 판 신부에게 한국에 고은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그가 우리 동해를 '대불(大佛)'이라고 불렀고, 만일 불교인들과 함께 그 푸른 물 속에 들어간다면 나는 부처의 자비 속에 있는 불자와 같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주고 싶었지만, 판 신부가 고은과 동해와 대불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다. 판 신부가 한마디 더 했다. “나는 존 힉(John Hick)처럼 '궁극적 실재‘니 뭐니 하면서 서로 다른 종교를 하나로 만들려는 데 반대한다. 하물며 같은 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여러 신앙양식이 있고 다 다르다.” 내가 물었다. “그러면 천주교인이 수천 명이 있으면 수천 가지의 천주교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럼 그렇게 나누는 잣대는 뭔가?”

판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종교인이 쓰는 언어야말로 종교간 대화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핵심이다. “성육화(incarnation)와 힌두교의 아바타(avatar)는 다른 언어이고 다른 만큼 종교체험도 다르다. 이런 점에서 언어야말로 핵심이다.” 그의 말에서 또 다원주의 냄새가 솔솔 난다. 그는 종교체험보다 언어를 더 강조하는 또 다른 다원론자 조지 린드벡(Gorge Lindbeck)을 따르는 듯했고, 실제로 물어보니 “부분적으로” 그의 이론에 동의한다고 했다. 좀 알쏭달쏭했지만, 그에게 분명한 것은 종교언어는 종교체험을 발생시키는 것이고 따라서 각 종교언어를 섞어서는 안 되며, 바로 이 지점이 그와 다원론자를 구분한다고 생각하니 그에 대한 이해가 한결 명료해졌고 강화도까지 온 보람도 느꼈다. 아직도 가야 할 여정이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가톨릭포럼에서 강연하는 피터 판 신부

교회 엔지오(NGO) 활동가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포럼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둑해 있었다. 한참 신나는 활동을 하고 난 뒤에 판 신부의 강의를 들어서인지, 통역을 하면서 훔쳐보니 민망스럽게도 여러 명이 졸고 있는게 아닌가! 이날 판 신부의 강의는 “아시아 교회와 선교”였고 판 신부는 엔지오 활동가들이 하는 일이 바로 얼마나 중요한 선교인지를 힘주어 말했다. 그의 선교관은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아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판 신부는 돌아가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선교에서 성령의 구실을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성령이야말로 선교의 가장 주요한 주체라고 했다. 더 이상 선교는 구원의 메시지를 이교도, 이방문화에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곳곳에 존재하는 성령을 발견하고 그 성령의 임재와 활동방식을 사람과 문화를 통해 배우는 과정에서 선교사가 복음화되며 이것이 선교의 시작이고 나아가 이들의 일상에 감화된 이들이 복음화되어 그들의 삶을 닮는 것이 선교다.

이 과정에서는 선교의 주체와 객체가 나뉘지 않으며 모두가 자기 일상의 일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는 선교사가 된다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엔지오 활동가들이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선교 가운데 하나라고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면서 몇 번씩 당부한 말은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일”이며 따라서 지치고 힘들어 때로는 포기하고 싶더라도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면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경훈/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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