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영화 - 진수미]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2012년작, 현재 상영 중

▲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2012년작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는 신이 사라진 시대,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없는 젊은 영혼의 이야기입니다. 배경은 1940~1950년대의 미국. 2차 대전의 트라우마를 딛고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 시대이자, 미국이 세계 질서의 패권자로서 위상을 획득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불안과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영혼들이 있었습니다. 종전 선언에서 맥아더 장군은 “평화가 회복되기를 빈다. 그리고 그것이 지켜지기를 신에게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 세대에게 평화는 일상의 공기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회복시켜야 하고 다시 사라지지 않게끔 지켜내야 하는 가치가 된 것입니다. <마스터>가 다루고 있는 사이비 종교 사이언톨로지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그것이 도리어 낯설어진 듯한 느낌, 자신의 청춘을 담보로 승전을 거두었으나 담보물의 회수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패배자가 된 듯한 상실감과 마주해야 하는 세대. 맥아더 장군이었다면 응당 신께 기도를 드렸겠으나 전선에서 수시로 죽음의 얼굴과 마주해야 했던 이들에게 신은 아마 공허한 기호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프레디 퀠(와킨 피닉스 분)은 해군으로 대일본전선에 참전했다가 종전 소식을 듣습니다. 제대 후 건실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폭력, 알코올처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산적한 삶이 그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프레디에게 어린 연인 도리스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이고 귀속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설명되지 않은 이유로 그녀를 떠났습니다. 추측건대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인지하고 그녀를 위해 이별이라는 형벌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부적응자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던 프레디는 사이비 심리학에 몰두하고 있는 랭카스터 도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를 만나, 그에게 매료됩니다. ‘마스터’라고 불리는 이 불가사의한 인물은 자신을 소설가, 철학자, 핵 이론가라고 포장해서 소개합니다. 랭카스터 도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 엘 론 허버트를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사이언톨로지는 인간에게 내재한 완벽한 정신 에너지를 복구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교리를 내세우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프레디가 랭카스터 가족 곁에 머무는 것은 마스터에게 의지하여 일상의 불안을 가라앉히고, 나아가 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랭카스터는 타고난 쇼맨십,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부기 나이트>에서도 그러했듯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상을 냉정하고 또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이 수상한 교주와 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랭카스터의 확신에 찬 치료 모임, 열렬한 지지자를 보여주는 한편, 이론적 허점을 짚어내는 논객과의 설전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힘 있게 그려냅니다.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종교화되어가는 사이비 이론의 정당성 유무가 아니라 표면상 주인과 노예로 보이는 랭카스터와 프레디라는 인물과 그들의 심리적 길항 관계이니까요.

랭카스터와 프레디는 행동의 패턴이 다를 뿐이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습니다. 랭카스터는 마치 처세술을 익힌 프레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알코올에 탐닉하고 분노로 자신을 방어하려 드는 성격적 결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프레디는 그의 성채를 지키는 문지기 혹은 사나운 파수견처럼 충성을 다합니다. 어쩌면 그러한 결함을 너무 잘 이해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동일한 약점을 갖고 있다면, 어쩌면 프레디는 랭카스터의 과거 혹은 원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프레디 역시 랭카스터처럼 변신에 성공하는 미래를 꿈꿀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 주인과 노예의 패러독스가 생겨납니다. 인간적 약점이 노출된 주인이 노예를 자연스럽게 길들일 수 있을까요? 노예가 주인의 순수한 원형처럼 보일 때, 그 관계는 역전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마스터>는 이 도착 관계를 긴장감 넘치는 내러티브로 풀어나갑니다. 앤더슨의 단절된 숏들, 스토리텔링의 불친절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독자가 직접 써내려가는(writerly) 텍스트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큰 즐거움을 선사할 영화입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오면 두 인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부각됩니다. 프레디는 자신이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랭카스터 도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면 랭카스터 도드는 프레디와 자신의 결정적 차이를 이해하고 이를 프레디의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인간적 폭과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랭카스터는 프레디에게 말합니다. “자유로운 바람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나. 자네는 뱃사람이니 집세 걱정도 없지. 원하는 곳으로 가 보게. 발붙일 곳이 없는 망망대해로. 그 어떤 마스터도 없이 사는 길을 찾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게. 자네가 최초일 테니.” 이는 랭카스터 역시 그 무엇의 노예이며, ‘마스터’로서의 삶이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랭카스터는 프레디 퀄이 바다에 속한 인간임을 간파한 최초의 사람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프레디는 바다 혹은 해변에 있을 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해군이 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랭카스터를 만나기 직전 프레디는 여기가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때 소녀 사환은 그에게 “걱정 말아요. 바다에 있어요”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랭카스터 역시 바다에서 왕성한 생산력을 보여주는 인간이지요. 그는 바다의 자유로움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 교단과 이론 등등 지반 위에서 단단하게 구축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유럽에 가서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부서지는 포말 외에 그 어느 것을 구축할 수도, 또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자유의 공간, 바다와 결별하게 됩니다.

프레디는 어떠할까요? 그가 땅 위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도망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제게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그가 영화관의 어둠 속에 침윤해 있을 때 스크린에서는 영화 <캐스퍼>의 대사가 들립니다. “선장은 배를 떠나면 안 돼.”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배를 떠나 랭카스터를 찾아 가지요. 그는 마스터가 되기에는 충동과 분노, 격정이 너무 많은 캐릭터입니다.

영화 <마스터>에서 무엇보다 칭찬해야 할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음악적 센스일 것입니다. 영화는 뛰어난 뮤지컬로 여겨질 만큼 음악의 감정적 고양에 기대어 두 남자의 멜로드라마를 풀어나갑니다.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마지막 세레나데 ‘On a Slow Boat to China’를 불러줄 때 그 떨리는 음성과 만감이 교차하는 두 남자의 표정만으로도 저는 감독의 전작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에 준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진수미 (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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