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6]

기적 보도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만 있다. 바울로는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일(사도 14,8 이하)이 있었지만, 그 사실을 자기의 친서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다른 책들은 기적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현실의 실마리를 풀려 하지 않는다. 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회고적(回顧的)인 서술에만 나타난다(샤를르 뻬로 지음, 박상래 역, <예수와 역사>, 가톨릭출판사, 1984).

바울로는 기적들이 실제 있었던 것으로 말한다(1코린 12,10; 2코린 12,11-12). “그것이 말이건 업적이건 표징들과 이적들의 위력이건, 영의 능력이건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두루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 전했습니다”(로마 15,19). 그의 설교는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코린 12,10)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나를 내세워 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한결같이 인내하며 여러 표징과 이적과 기적으로 참사도의 표지들을 드러냈습니다. (2코린 12,11-12)

복음사가들의 회상에 의하면, 예수도 하느님의 나라를 당신의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였다. 말씀과 동작은 연결되어 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마르 1,23-27)

▲ ‘라자로가 살아나다’, 조토의 작품(1306)

‘기적’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말하는 것과 같아

예수는 “온 갈릴래아에 있는 회당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바로 그 현장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시켜주는 동작들이다. 그것은 해방의 동작, 구원의 동작, 생명을 주는 동작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새로운 이해, 곧 언제나 현존하는 주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이제 벌써 진행되고 있는 해방과 구원에 입각하여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적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말하는 것과 같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해방과 구원의 체험을 매우 짙게 하면서 살았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서에서 스승의 기적을 회고하는 것은 해방과 구원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찾는 데 있다.

기적은 장애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동작이며, 인간 앞에 닥친 한계, 곧 악, 질병, 죽음 등을 초월하는 동작이다. 파스카의 체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 사라진 것이었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오른 편에 계신 인자가 보입니다”(사도 7,56). 예수로 말미암은 해방과 구원이 실현되었다는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인간의 처신이라는 구체적 현실에까지 와서 닿게 된 것이다.

공동체가 예수의 행적에 대해 회상할 때, 십자가의 죽음 다음으로 소중히 생각한 것은 예수가 행한 기적들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실제로 현실 안에 행동하는데 있어서는 더 이상 기적에 호소하지 않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기적을 회고한다. 무질서, 혼란, 악마의 해악, 가난한 이의 고통, 질병과 죽음이 있는 현실에 그들은 대처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기적을 회상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그들은 기적을 회상하면서 언어를 발생시키고, 그 언어는 사람들을 움직였다. 예수는 이 세상의 재앙, 불행, 고통과 대조적인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그런 의식이 기적을 가능하게 했고,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의 기적을 회상하는 것은 예수의 그런 의식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들이 기적 이야기를 하는 데는 호교론적(護敎論的) 동기도 있었다. 기적 이야기로써 예수의 특권적 위치를 증명해 보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 모음(4,35-5,43), 마태오 복음서의 10개 기적 모음(8,1-9,34), 그리고 루카 복음서(4,36; 5,17; 6,19; 8,46)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호교론적 동기는, 그리스도적 실천을 위한 공동체의 회상이라는 첫 번째 동기에 비하면, 2차적이고 후대에 속하는 것이다. 기적을 회상해서 하는 이야기들 안에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해방과 구원에 대한 공동체의 체험과 실천이 그대로 다 기록된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를 낫게 한 이야기(마르 2,1-12), 하혈하는 부인을 낫게 하고,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 이야기(마르 5,21-43), 그리고 안식일에 베짜타 못에서 병자를 고친 이야기(요한 5,1-18) 등을 들 수 있다.

기적 이야기를 알아들은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 행업에 참여하고자 노력한다

기적에 대한 회상은 새로운 인식과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비유는 공관복음서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화법이다. 비유는 가치들의 모형(模型)을 새롭게 만들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가치를 따라 행동하도록 초대한다.

기적 이야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하도록 하는 동작을 회상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예수가 당신의 기적 행위에 부여한 모든 의미를 자기의 실천 안에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비유와 기적은 모두 의도된 가치를 담은 모형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화법이다. 따라서 독자는 같은 기적이 자기에게도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 이야기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행업을 알아듣고, 자기도 그 안에 동참하는 노력을 한다.

신약성서의 서간들은 장차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지 않는다. 서간들은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고, 기적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기적에 의지하여 무엇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서간들은 그 시대 신앙공동체의 복음 선포와 실천적 현안(懸案)들을 다루는 문서들이다. 그 서간들이 기록될 당시 신앙인들은 실천적 영역에서 기적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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