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자카르타 시내는 고요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한 환전소에서 직원이 달러를 세고 있다 (사진출처-동아일보)

2007년 무려 57%나 폭등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주식시장으로 평가되었던 인도네시아의 주식시장은 다른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2008년 한 해에 50%가 넘게 떨어져서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1997년의 경제위기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제기되었지만 자카르타 시내는 아직은 조용하다. 최근 루피화가 9,000에서 13,000으로 급락했지만 서민들의 반응은 1997년의 경제위기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1997년 당시 루피화의 폭락으로 시작된 폭동과 소요사태는 30여 년에 걸쳐 철권통치를 했던 수하르토마저 물러나게 했다.

 ‘굴뚝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업가의 자부심

“이번 세계 금융위기는 1997년과 다릅니다. 그때는 실물경제 위기라서 공장이 문을 닫았지만 이번엔 그저 금융위기거든요. 부자들 문제이지 일반 서민들하고는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알루미늄 자재업 등 제법 큰 규모의 중소기업 그룹을 운영하는 기업가 파울루스(58세)가 한산한 은행 앞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이나 싱가포르와 달리 서민들은 은행에 예금을 하지 주식을 하지는 않거든요.”

그가 운영하는 기업에는 큰 상처가 없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자기는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가 가진 자산은 주식과 같은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실제 자산이며, 수출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국내 실수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타격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그의 말에서는 실제 경제와는 상관 없이 투기만 일삼다가 망해버린 금융자본가들에 대한 경멸과 ‘굴뚝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업가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전지구가 금융위기로 몸살을 앓는 지금 1997년 경제위기의 진원지였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뜨거운 이슈는 경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포르노그라피이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국회는 몇몇 관광지에서는 비키니를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예외조항과 함께 배꼽티을 금지하는 등 포르노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와 여성단체,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이슬람화를 우려하는 다른 종교 측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건 단지 포르노문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계속 세속적 국가로 유지할 수 있느냐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에게도 경제는 지금 관심의 뒷전입니다.” 가톨릭계 주간지 <히둡(Hidup)>의 편집국장 시홀(Sihol)의 이야기이다. 그나마 그 시위도 1997년과는 달리 잘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주말에는 그나마 그 시위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주말에는 쉬어야죠.” 넉살좋게 농담을 던지는 시홀의 모습만큼이나 인도네시아의 길거리는 안정되어 있었고 전지구적 경제위기가 미치는 여파는 제한적이었다. 시홀과 파울루스는 이구동성으로 서민들에게 지금의 금융위기는 부자들의 숫자놀음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아트마자야 가톨릭대학의 경제학 교수 시마르마타(Simarmata)는 현재의 위기상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체감되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내년이 위기입니다. 그리고 1997년과 달리 이번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에 영향을 미친다면 농촌에서부터 파국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는 1997년의 금융위기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실물경제에 직격탄을 날려 공장이 문을 닫고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된 반면 이번 금융위기는 무역을 통해 우회하여 인도네시아에 충격을 가할 것이고 그 목표는 농업과 농촌이 될 것이라고 한다.

농업을 비롯한 자급경제가 아직 주요산업으로 살아

인도네시아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GDP의 47.8%이다. 이 중에서 농업부문의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3.7%이며 광업이 11%를 차지한다. 인도네시아가 수출하는 농산물과 광물은 대부분 플렌테이션에서 생산되어 대량으로 소비되는 팜유와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국제경제가 출렁일 때마다 그 가격이 심하게 요동한다. 일례로 팜유는 2008년에만 40%나 가격이 하락하였다. 1차 농산물에 끼여 있던 거품이 꺼지지 시작한 것이다. 이런 1차 생산물 가격의 폭락은 지난 2분기에 인도네시아의 경상수지를 15억 적자로 돌아서게 하였다.

게다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자원에 대한 투기와 바이오 오일 등에 대한 기대 등으로 식량 생산을 위한 농경지를 밀어내고 수출을 위한 플렌테이션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또한 플렌테이션 자체가 투기의 대상이 되어 가격이 급속도로 올라갔다. 1차 농산물의 가격폭락과 함께 플렌테이션에 끼여 있는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 인도네시아 농촌은 급속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지금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세계무역의 퇴조와 함께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부메랑이 되어 농촌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는 경고하였다.

그는 현정부가 경제의 토대는 튼튼하고 문제 없다고 하는 말이나 사치품에 대한 감세정책 등으로는 결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가 현 정부에서 그나마 기대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금융장관을 맡는 이드라와티(Sri Mulyani Indrawati)이다.

그녀는 지난 10월 인도네시아 최대 재벌 바크리에(Bakrie) 그룹에 공적자금을 투여하자는 정치권과 경제계의 압력을 단칼에 묵살하였다. 바크리에는 현 정부의 각료이기도 했던 인도네시아 최고의 갑부 바크리에(Aburizal Bakrie)가 소유주로 있는 기업인데, 지구적 금융위기 때문에 12억 달러를 즉시 상환해야 하는 유동성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자 사퇴압력을 받았다는 뉴스보도가 나가고 대통령궁에서 이를 부인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시홀과 파울루스는 그녀의 강력한 지지자이다. 시마르마타도 자신이 경제학자로서 “그의 모든 정책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장관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렇듯이 한국을 강타한 전지구적 금융위기는 아직까지는 1997년 경제위기의 진원지인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주고 있지는 않다. 태국 역시 최근 반정부 시위대의 공항점거로 관광사업이 침체를 겪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지만, 그것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태국의 바트화는 이 정치적 위기사태에도 겨우 달러에 대해 1-2바트(40원-80원) 정도만 떨어질 만큼 ‘놀라울 정도’로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까지 경제의 금융화와 금융의 자유화, 그리고 세계경제에 편입된 정도가 한국만큼 극심하지 않은 점 그리고 농업을 비롯한 자급경제가 아직 주요산업으로 살아 있는 점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장 부러움을 느낀 것은 정치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소신을 지키는 경제장관이 적어도 한명은 버티고 있는, 그들의 정치였다.

 

엄기호/ 국제연대 코디네이터, 국제가톨릭지성인문화운동(이크미카) 아태지역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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