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0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마태 6,9)

‘주의 기도’(* ‘예수의 기도’라는 명칭이 좀 더 적절하다)는 세 가지로 전해진다. 다섯 개의 기도로 된 짧은 형태(루카 11,2-4)와 서로 연관된 긴 형태(마태 6,9-13; 디다케 8,2). 마르코 복음과 요한 복음, 그리고 바울의 편지에서 주의 기도는 빠져 있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쓰인 바울의 편지에서 주의 기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다. 그렇게 중요한 기도를 바울은 왜 외면했을까. 바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의심과 평가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바울은 예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라고 언제부턴가 나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 ‘주님의 기도’,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6)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는 3개의 2인칭 기도(Du-Bitten)와 3개의 1인칭 기도(Wir-Bitten)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 교부신학자 대부분은 예수의 기도가 6개 기도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으로 예수의 기도가 7개 기도로 되었다는 전통적 주장을 지킨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3권으로 된 최근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역시 7개설을 주장한다. 예수의 기도는 6개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마태오의 의견에 더 어울린다.

마태오는 ‘의로움’이란 주제 아래 자선, 기도, 금식, 세 가지를 다루고 있다(마태 6,1). 자선과 기도를 언급하고서 예수의 기도가 언급되고, 금식 부분은 ‘예수의 기도’ 다음에 나타난다. 마태오 복음 주석에서 손꼽히는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와 슈바이처(Schweizer)는 자선, 기도, 금식을 좀 더 연결하려는 의도에서 예수의 기도 이전에 금식 구절을 해설한다. 가톨릭 성서학자 그닐카(Gnilka)는 마태오의 순서를 따라 예수의 기도 이후에 금식을 다룬다.

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빵을 위한 기도’ 후에 금식을 다룬 마태오의 의중을 따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기도는 원래 아람어로 전해졌고 예수가 직접 한 말이라 여겨진다. 유다교의 카디쉬(Qaddisch) 기도를 모범으로 삼아 좀 더 간결하고 쉬운 단어로 예수가 만든 기도이다. 카디쉬에 나타난 기도 순서를 바꾸어 예수는 먼저 하느님에 관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을 남성인 아버지라 부른 것은 유다교가 주위 문화에서 본뜬 것 같다. 당시는 가부장 사회였고 종교인 대부분은 남자이며 종교 문헌들도 아마 남자들의 작품일 것이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좋은 연상들만 기억하자.

물론 하느님을 여자나 엄마라고 부를 수 있다. 여성신학에서 그런 타당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 그런 구절도 적지 않다(이사 49,15; 66,13). 그러나 하느님을 어머니라 칭한 구절은 공동성서나 신약성서에 전혀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뒤엉키는 그리스 신화의 세계나 범신론적(汎神論的) 오해를 막기 위해 하느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던 것일까? “하늘에 계신”이란 단어로써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연상을 하느님 관념에서 끌어내는 오해를 막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에서 ‘인간 세상사와 무관한 하느님’이라는 해설을 끌어낼 필요는 없다. 요즘 환경을 강조하는 신학 흐름에서 우주나 지구를 ‘어머니’라고 칭하는 범신론적 주장이 보이기도 한다. 자연과 환경을 존중하고 강조하는 마음에 범신론이 슬며시 끼어들 필요는 없다. 범신론은 매력적인 면도 적지 않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먼 사상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행에서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결론을 이끌어낼 필요도 없다. 여성을 차별하는 근거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시대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행을 아예 삼가는 것이 혹시 어떨까? 그냥 “하느님”이라 부르든지, 아니면 “하느님 어머니”와 “하느님 아버지”를 같이 사용하든지 말이다. 하느님을 생각할 때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아늑한 느낌을 마음껏 누려도 된다.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는 사람은 그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느낌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인간의 경험과 언어는 하느님을 번역하는 도구이다.

시인 김춘수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이름’은 유다 문화에서도 존재 이상의 깊은 뜻을 가진다. 고대인에게 이름은 세력 자체이다.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지었다면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 짓는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이름 지었다. “아버지”(ab)라는 뜻의 아람어 단어에서 “아빠”(abba)라는 좀 더 친근한 명칭으로 예수는 하느님을 호칭하였다.

하느님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에 대한 호칭을 삼가는 유다인의 마음을 예수가 무시한 것은 전혀 아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중의 마음에 친근함과 신뢰감을 보태는 단어를 예수는 새롭게 소개한 것이다. “아빠”를 사용한 예수의 기도에서 반(反)유다적인 경향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좋은 뜻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호칭을 삼가는 유다인의 자세를 존중해야 하겠다. 예수의 기도는 유다교 정서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 유다교를 무시하려는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 그런 유혹에 빠진 기도와 설교가 그리스도교에 넘쳐난다.

‘거룩하게 하시며’라는 구절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자 인간의 다짐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안타까움이 담긴 구절이다. 다신론 사회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찾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진정한 이름을 십자가에서 알려주었다.

오늘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 오늘 누가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가? 무신론인가, 우상숭배인가. 유신론의 반대는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다. 우리 시대 우상은 돈, 권력, 명예를 가리킨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그들은 돈도 믿고 권력도 믿고 명예도 믿는다. 그리스도교인 대부분은 우상숭배자에 속한다.

무신론자보다 우상숭배자가 그리스도교에 사실 더 심각한 위협이다. 그리스도교 안에 우상숭배자들이 많다. 이단보다 대형교회 목사가 그리스도교에 더 위험하다. 지배층 성직자나 목회자가 우상숭배자일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리스도교는 외부 위협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부 파괴자들에 의해 자멸하기 쉬운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지 않게 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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