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 백동흠]

이른 아침, 택시를 부른 매시 지역에 가보니 대로변 집이었다. 그것도 주차금지를 알리는 노란 선이 진하게 그어져 있었다. 통행량이 많은 길이라 차량 소통을 우선으로 해놓아서 주차하기가 어려웠다. 어떡한다? 손님이 곧 나오겠거니 생각하고 인도와 차도에 개구리 주차를 했다. 비상등을 깜빡인 채 기다렸다. 20여 미터 집 안쪽에서 나이든 여성 손님이 자기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빨리 들어오라는 거였다. 아니, 내려오라는 수신호였다.

그런데 진입로가 푹 꺼진 상태라 무척 난감했다. 들어가서 돌려나올 공간이 없었다. 천상 들어갔다 나오려면 바쁜 도로 쪽으로 차 뒤꽁무니를 바짝 치켜들고서 거꾸로 나와야 할 상황이었다. 위험스러울 것 같았다. 생각다 못해 차를 그대로 세워둔 채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짐이 있으면 들고 나오고, 걷는 게 불편하면 부축이라도 할 셈이었다.

그런데 웬걸, 인사를 하자 육십 대 중반가량의 여성 손님이 화부터 버럭 냈다. “들어오라니까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사정을 이야기하고 간신히 함께 걸어 나와 손님을 태웠다. 목적지를 묻자, 그린레인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응답 목소리가 왠지 가녀리고 떨렸다. 웬일일까? 조심스레 룸미러로 뒷좌석 손님 얼굴을 바라보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며칠 전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집에 들러 몇 가지 옷 좀 챙겨 나선 길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정신이 제대로일 리가 없었겠다. 이럴 때 택시 운전사가 뭐 대수겠는가.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혼잣말로 속내를 다시 흘렸다. “미쳐버리겠다고!” 푸념인가, 체념인가? 병원까지 반 시간가량 가는 데 침묵과 염려가 칙칙한 택시 안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뭐라고 위로해줘야 하나?

손님을 병원에 내려주고 나서는데 도로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차가운 지난밤 기온 위에 으스스하게 젖은 기운이 가라앉으니 한없이 을씨년스럽다. 한창 바빠 붐비던 아침 출근길도 한가해져서 지나는 길에 주유소에 들렀다. 연료를 가득 채우고 난 뒤, 라떼 커피 한잔을 뽑아 주유소 창가 간이의자에 앉았다.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니 답답했던 마음도 서서히 풀렸다. 내린 손님은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을 만나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창밖 세상이 온통 희뿌옇다. 잔뜩 화가 난 세상이 뾰로통 삐친 얼굴이다.

▲ “한 주가 끝나면 토요일은 등산하는 날로 떼어놓아 두었다. 네댓 시간가량 산이나 바다를 끼고 도는 트램핑 코스를 돌며 땀도 흘리고 스트레스도 녹여내며, 자연 속에서 에너지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결국 나한테도 ‘오직 나(Only me)!’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백동흠

누군가 읽다가 펴놓고 간 뉴질랜드 헤럴드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울증(depression)에 얽힌 자살 사건 보도와 우울증 현상이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들이 다양하게 이어졌다. 세상이 가뜩이나 경제 침체기에 힘들어하는 터에 뉴질랜드는 겨울까지 맞아 우울감이 더 깊은 것 같다. 가정이나 사회나 공동체 내에서도 진심 어린 관심 부족이 피부로 느껴지면서 상대적 상실감에 휩싸이는 형국이다.

삶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고 정신이 극도로 산만해지기도 한다. 여기에 갱년기를 맞는 여성들의 경우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한 편이다. 전에는 그냥 넘어갈 일들도 유독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여 수시로 발끈 화를 내게 된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진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에게 괜히 짜증을 내기가 일쑤다. 이렇게 우울할 때 남편이나 자녀들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면 이제껏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싶어 분노가 일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기도 한다. 당연히 만사가 뒤틀려 보이고 귀찮아진다. 자신을 꾸미는 일조차도 싫어진다. 이렇게 살아서 뭣하나 싶어 극단적인 생각을 갖기도 한다. 중년 너머의 여성 손님 중에 더러 그런 마음 상태를 분출시키는 경우가 있다. 대응의 첫째 자세는 ‘오직 너(Only you)!’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그러려니 이해를 하려고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이성적으로만 대응하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여지없이 내가 그 스트레스에 쉽게 무너져버리곤 한다. 그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결국은 내가 약해져 비슷하게 그 증상이 전이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일이나 사람에 치여 어떨 땐 정말 내 안에서도 불현듯 ‘미쳐버리겠다고!’ 하는 생각이 가슴을 조여오기도 한다. 오늘 점심시간에 학교 청소하는 후배와 만나 함께하며 두어 시간 이야기하면서도 이 우울증에 대해 의견도 나눴다. 내 경우 한 주를 어떻게 보내냐고 묻기에 이렇게 얘기했다.

한 주가 끝나면 토요일은 등산하는 날로 떼어놓아 두었다. 네댓 시간가량 산이나 바다를 끼고 도는 트램핑 코스를 돌며 땀도 흘리고 스트레스도 녹여내며, 자연 속에서 에너지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월요일엔 눈물이 나도록 웃는 시간을 마련해두었다. 재미있는 개그프로그램을 한 편씩 즐겨보는데 폭소에 눈물까지 흘러나와 엔도르핀이 온몸을 확 녹여내서 참 개운한 느낌이 들곤 한다. 또 하나는 햇볕 속에 있는 시간을 가급적 많이 가지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밥 먹고 싶은 사람과 만나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며 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결국 나한테도 ‘오직 나(Only me)!’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손님이 한마디씩 전해준 말이 생활 잠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이 행복한 건가요?” 어제 만난 칠십대 할아버지에게 여쭤봤다. 할아버지 답변이 가슴에 새겨졌다. “한 지붕 아래 한 침대 쓰는 부부로 사는 것이지.” 그렇질 못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따로따로 자지 말란다. 그러면 “미쳐버리겠다고”가 되는 건가?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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