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원을 찾는 수행자, 시인 구상(具常) - 4

시인 구상이 박정희와 특별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구상이 1949년 육군 정보국에서 일할 때 정보국장이 이용문 장군이었는데, 그의 소개로 대구에서 박정희를 처음 대면했다. 당시 박정희는 34세, 구상은 32세였다.

한국전쟁 당시 구상은 <승리일보> 주간으로 종군작가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당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만나 자주 술을 마셨다. 이를 두고 구상은 “의기투합했지. 말이 통했어”라고 말한다. 이용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53년 6월 24일도 대구에서 저녁에 셋이 함께 만나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박정희와 구상은 1960년 4.19 이후 정국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4.19 Ⅳ’라는 시에서는 “40일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판이었다. 4.19의 젊은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단상을 점령하는가 하면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마저 해방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어설프고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는 시국 진단이다.

구상은 당시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 썼다. 당시 박정희는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한 구절을 부르곤 했다는데,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 운운하는 노래였다. 구상은 박정희의 사무라이 기질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 구상 시인 (사진 출처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박정희는 그 노래 가사처럼 1961년 5월 16일 한강을 건너 쿠데타를 감행했다. 구상은 당초 5.16 쿠데타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거사 직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박정희를 자기 집에서 한 달 가량 은신시켜 줌으로써, 만약 거사가 실패한 경우에 중요 시국사범으로 처리될 각오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구상을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5월 19일 장갑차가 포진한 국제호텔에서 구상을 불러다 앉혀놓고 술잔을 건넸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는 구상을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구상은 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구상은 이날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亡種)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구상은 자신을 “남산골 샌님으로 남겨 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경향신문사 동경지국장을 맡아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구상은 이를 두고 “말하자면 피신이었지요. 이곳에 있으면서 (정치) 참여는 안 하면서 친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잘 했느니 못 했느니 시비를 할 수도 없고 해서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결국 구상은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거의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동경에 머물며 폐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1970년대에는 하와이 대학 극동어문학과 교수로 취직해서 5년 넘게 있었다. 동서문화센터에서 상주 작가로 머물기도 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구상은 박정희를 ‘박첨지’라 부를 만큼 두 사람은 여전히 각별한 사이였다. 구상은 박정희에 대한 개인적 소견으로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어. 군인 때 만났지만 아주 해박했어. 플라톤의 국가론도 읽고, 월남 패망사도 읽고 한 마디로 박학다식에 견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어”라고 평가했으나, 구상의 딸 구자명은 어느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인간 박정희’를 좋아하셨지만 그 시대의 정치를 좋아한 건 아니다”라고 구별했다. 실상 구상이 5.16 쿠데타의 필요성을 공감할 수는 있었겠지만 장기집권을 노리던 박정희의 유신 시대를 탐탁하게 여겼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박정희가 무소불위의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 구상은 세 번째 필화 사건을 경험했다. 1965년 구상은 <수치>라는 희곡을 써서 당시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는데, 그 희곡이 ‘이적 혐의’로 사전심의에 걸려 공연 취소는 물론 관계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수치>라는 희곡은 어느 지리산 빨치산 여대원의 이야기였다. 산속에서 짐승같이 살면서 능욕을 당하던 여대원 한 명이 ‘정말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귀순하지만, 거기서도 경찰의 비열한 유혹과 가혹한 행태가 자행되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관계기관은 이 내용이 국립경찰의 품위를 훼손하고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판단했다.

구상은 1970년대에 주로 종교적인 시 작업에 몰두했는데, 성바오로출판사에서 <구상문학선>(1975년)을 출판하고, 이어 <그리스도 폴의 강>(1978년), <나자렛 예수>(1979년)을 출간했다. 그는 이 시기에 출판사의 요청으로 여러 차례 문학강연회를 하러 다녔는데, 그 와중에 유신 정권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해서 기관원들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정권 말기에는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9월에 박정희를 직접 찾아가 “임자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어” 하며 간곡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지만, 당시 박정희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결국 박정희는 그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고, 친구였던 구상은 그를 위해 5년 동안 연미사를 성당에 넣었다. 당시 심경을 구상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세상이 다 죽일 놈으로 모는 악당일지라도 친구는 친구니까 5년 동안 내가 제례미사를 드렸다”라고 표현했다. 정치적 차이와 개인적 친분은 서로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와 구상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구상의 삶은 쉽게 폄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절친으로 둔 구상은, 서울 여의도의 허름한 17평 아파트에서 30년을 살다 이승을 하직했다. 친구의 위세에 빌붙어 권력을 탐하지도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았다.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을 때,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이것도 거절했다. 그 후로도 민정당 총재 고문,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마다했다.

그의 청렴과 곧음은 의심할 바 없지만, 유신 정권에 대해 구상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1970년대는 가톨릭교회의 주교들조차 나서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던 시기였다.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 서울대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은 물론 전주교구의 김재덕 주교, 안동교구의 두봉 주교 등이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참여했고, 수많은 사제들과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의 노동자, 농민들이 투옥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 구상 사인 (사진 출처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그러나 정치적 관심이 구상을 사로잡지 않았다. 그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힘닿는 선에서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도왔다. 일제 식민지 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던 박정희를 줄곧 비판해왔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조차도 구상을 “구도자의 미학을 실현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신 시대에 박정희와 거리를 유지하던 구상이었지만, 문단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이름을 팔았다’.

1974년 1월 7일 소설가 이호철이 ‘문학인 61인 선언’의 자리를 만들고 개헌을 위한 100만 인 서명운동에 문인들이 앞장서겠다고 선언했다. 선언문은 백낙청이 기초했다. 이튿날인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고 ‘선언’에 참여한 대다수 문인이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이들은 곧바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가택연금 상태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됐다.

며칠 뒤 이호철과 정을병 등 두 소설가와 김우종 · 임헌영 · 장백일 등 세 평론가가 이번에는 ‘남산’이 아닌 악명 높은 서빙고의 국군보안사령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갔다. 그리고 2월 25일 이들을 엮어서 ‘문인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호철 · 임헌영에게는 간첩죄, 다른 세 사람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됐다. 이들이 북한 공작원이었던 잡지 <한양> 발행인에게서 공작금을 받고 정부 전복을 위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법정에서 그들의 무죄를 입증해 줄 유력한 증인이 필요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구상이 증언대에 올라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며 정보당국을 꾸짖었다. 결국 10월 31일의 항소심 공판에서 정을병은 무죄, 다른 네 사람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구상 시인은 해방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성 베네딕도회가 다시 자리 잡은 왜관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적어도 그는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나 이효상처럼 유신 정권과 밀착되어 독재정권을 유지하는데 협조하지 않았다. 그는 유신 정권 내내 시인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불우한 예술가였던 이중섭 등과 교류하며, 문단의 지킴이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한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에 입신하려던 적도 있었지만, 한 번 마음을 돌린 후에는 그저 시인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1970년대에 새긴 ‘까마귀’라는 시에서는 그가 오히려 시인을 예언의 자리로 돌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직접 정치에 투신해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이기보다 “눈 뒤집힌 세상살이를 굽어보며 / 저 요르단 강변 세례자 요한의 그 예지와 진노를 빌려서 우짖는” 예언자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자신의 소임을 “불길을 몰아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불의가 빚어내는 재앙을 미리 알리고 일깨워 줄 따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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