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예수살기 총무, 최헌국 목사

어느 자리에선가 개신교 목사의 우스갯소리 섞인 푸념을 들은 적이 있다. 용산이나 대한문, 강정마을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개신교 목사들도 있는데, 시각적으로 천주교에 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는 목사 열 명이 와도 제의를 갖춰 입은 사제 1명을 못 당할 거라고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일리 있는 푸념이다. 사람들은 열 마디 말보다 강렬한 사진 한 장에 더 쉽게 마음을 열곤 하니까. 어쩌면 이번 달 초 대한문에서 만난 이 사람도 ‘눈에 잘 안 띄는’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개신교 신앙운동단체 ‘예수살기’ 총무 최헌국 목사다.

최 목사는 전날 제주 강정마을에 다녀온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은 듯 피곤한 기색이었다. 지난 달 대한문 앞 단식기도 이후 건강 상태를 물으니 짧게 “괜찮다”고만 말했다. 8일간의 단식은 생명을 건 무기한 단식농성조차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짧게 여겨질 기간이겠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땡볕에, 매연 가득한 도심에서, 당뇨병 증세까지 겹쳐있다면 말이다.

▲ 최헌국 목사는 6월 13일부터 8일간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기도를 했다. (사진 제공 / 최헌국)

최 목사가 한시적인 단식기도를 결심한 건, 서울 중구청의 쌍용자동차 분향소 철거 때문이었다. 4월에 있었던 첫 철거 때에는 경찰에 항의하다 연행돼 유치장에 구류됐었다. 두 달 뒤 6월 10일 아침, 느닷없이 두 번째 철거가 강행된 후 최 목사는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단식기도처를 마련했다.

“분향소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단식기도처를 떠올렸어요.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었죠. 이곳에 오는 성직자들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거예요.”

최 목사는 경찰이 그런 성직자들의 심정을 ‘종교를 빙자한 불법행위’로 규정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찰은 대한문뿐만 아니라 여러 현장에서 미사나 개신교 예배 등 종교예식을 진행할 때 방송차량을 동원해 ‘종교를 빙자한 집회’ 혹은 ‘종교를 빙자한 불법행위’를 그만하라고 경고 방송을 한다. 최 목사는 종교인으로서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최 목사는 요즘 거의 매일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에 출근하듯 나와 자리를 지키지만, 다른 고난의 현장에도 자주 ‘출몰’한다. 그가 총무를 맡고 있는 예수살기 이름으로 방문하는 현장 외에도 그의 손이 닿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느 현장이든 찾아간다. 그것이 종교인으로서 “보수와 진보를 떠나 성서의 가르침을 쫓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부모님 덕분에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항상 도우려는 마음을 갖고 살아온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나눔이 몸에 배어있는 분들이었다. 어머니는 반찬을 만들면 어려운 이웃들과 나눴고, 아버지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학생 여럿에게 학비를 대주곤 했다. 그의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도 부모님이 몸소 가르쳐주신 이웃 사랑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신앙을 접했지만, 저는 본래 자기애가 강하고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성향이라 신앙과 거리를 뒀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침례교 교회에 나가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소명을 받는다고 하죠? 처음에는 거역했어요. 하지만 목사직이 무언지 이해하면서 목사가 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목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거예요.”

침례교는 개신교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다. 최 목사도 신학교에 들어올 때까지 방언기도와 통성기도에 몰두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최 목사는 신학교에서 폭 넒은 신학 공부에 대한 갈망을 더 크게 느꼈다. 그는 스스로 신학서적을 찾아 읽고 공부하면서 성서와 신학에 새로운 눈을 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 대학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 열기가 뜨거웠던 때였다. 최 목사는 신학교가 있던 대전에서 서울을 오가며 시위에 자주 참가했다. 다른 학생들은 설교 방법론에 대한 책이 많았는데, 최 목사는 신학과 교회사, 사회과학 서적이 훨씬 많았다.

“주변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어떻게 운동권이 됐냐, 의식화 교육을 받았냐고 하는데 사실 스스로 의식화됐던 거죠. 1985년에 저희 학교에서 학교호국단을 없애고 총학생회를 만들었어요. 첫 행사로 광주민중항쟁 기도회를 열었어요. 처음엔 가투(가두투쟁)까지 계획했었는데, 준비과정이 경찰에게 들키는 바람에 학교가 발칵 뒤집힌 거예요. 저를 아끼시던 교수님은 저보고 피신하라고까지 하셨죠. 하하. 결국 행사 개최에 의의를 두고 예배만 드렸어요. 그런데 예상보다 참석자가 많았어요.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회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걸 깨달았죠.”

▲ 예수살기 총무, 최헌국 목사 ⓒ한수진 기자

될성부른 나무는 그렇게 떡잎을 키워 졸업을 하자마자 1989년 안양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재정의 절반을 사회선교에 사용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특별한 날에는 철거촌이나 노동현장을 찾아가 다른 이웃들과 예배를 드렸다. 1991년 노조 활동을 이유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씨가 안양병원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회에서 활동하던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경찰의 ‘시신 탈취’에 맞서기도 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 최 목사의 활동을 불편해하지는 않았을까? 최 목사는 “침례교가 성서를 보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사회적 해석이 부재한 풍토를 가지고 있지만, 다양성은 인정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는 목회 방식이나 교회 운영 구조 등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제시 잭슨 목사도 침례교예요.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침례교가 인권과 평화 문제에 많은 역할을 해왔어요. 물론 교단에서 제가 하는 일을 우려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제가 가진 신학적 이해를 이야기하면서 토론하면 함부로 말씀하지 못하시더라고요.”

1997년부터 5년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은 공동체를 일구고, 이후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담임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던 최 목사는 2007년 다시 교회 개척을 고민하게 됐다. 그러던 차에 예수살기가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수살기는 최 목사가 다시 거리의 현장에 나오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 3월 예수살기가 출범 하면서, 마침 맡고 있는 교회가 없던 최 목사가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광우병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용산참사, 4대강, 쌍용차, 한진중공업, 강정마을 등 수많은 현장에서 예수살기의 몫으로 힘을 보탰다.

“목회는 보람과 가치 속에서 하는 일이에요. 내가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죠. 사람들이 어디에 가서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최 목사는 예수살기 총무로, 또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촛불 기도회의 실무자로 활동하는 것이 “가장 보람이 큰 목회 활동”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울 동교동 ‘두리반’ 철거 반대 활동에 참여해 결국 승리를 맞이했던 경험은 잊기 힘들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최 목사는 언젠가 다시 도시 근교에서 작은 교회를 일구는 꿈을 꾸고 있다. 그가 가끔 집회 현장에서 발언 중에 “이제 그만 목회 좀 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앓는 소리를 하는 건 그냥 빈 말이 아니다.

“저한테 놓인 첫 번째 과제는 지금 정권 이후에 다시 민주 정권이 들어서는 거예요. 그 다음엔 예전처럼 교회를 개척해야죠. 능력이 되는 만큼 작은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서, 몇 사람이라도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복지 목회’를 구상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는 은퇴하기 전에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몇 년간 기아 난민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일 보람과 가치 있는 삶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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