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문의면 마불갤러리 방문기

그러니까 작년 여름 전남 영광 태청산에서 부부를 만났다. 첫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후줄근한 한복을 입고 삼베로 만든 두건을 머리에 쓴 남편은 손재주가 대단했다. 주변에 긴 풀들을 한 아름 모아오더니 그것을 이리저리 엮어 쓰임새 있는 물건을 만들어 보였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두런두런 재미난 이야기도 풀어내고 영락없는 옛날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부인은 고왔다. 사람들을 모아 큰 나무 아래에서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명상을 지도했다. 평화롭고 온화한 기운이 풍기는 얼굴에서 오랜 수행의 연륜이 묻어났다. 엄마 아빠하고 부부를 부르는 꼬맹이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문의’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한지 공예가 겸 회화 작가 마불과 명상가 메루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산다. 면 소재지에 있는 ‘마불갤러리’가 그들의 거처이다. 한지와 나뭇가지로 만든 등에서 새어나오는 조명으로 갤러리 안 분위기가 사뭇 그윽했다. 곳곳에 진열된 소박하고 자연스런 느낌의 그림과 한지 작품들은 방문객의 마음을 편케 해주었다.

마불(麻佛)은 이웃처럼 평범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며 갤러리 주인장 이종국 씨의 별칭이다. 메루는 인도에서 명상을 배우고 온 안주인 이경옥 씨의 애칭이며 인도어로 ‘사랑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우리 말고도 갤러리에는 손님이 한 분 더 있었다. 암 투병 중인데 때때로 이곳을 찾아 메루의 지도를 받으며 치유를 위한 명상을 하고 간다고 했다. 마불갤러리 한 귀퉁이에 아담하고 아늑한 명상실이 자리해 있었다.

메루가 손님과 명상을 하는 동안 마불은 우리를 이층에 있는 살림집과 작업실로 데리고 가 종이 뜨는 법을 알려주었다. 한지의 원료는 닥나무 껍질이다. 밭에서 1년 동안 키운 닥나무를 잘라 솥에서 푹 삶아낸 후 겉껍질을 벗긴다. 그리고 햇볕에 널어 말린 다음 다시 찬물에 불린다. 그다음 잿물을 만들어 거기에 삶아 표백하고 잿물을 뺀 후에는 방망이로 두들긴다. 죽처럼 만들어진 섬유질을 물에 풀어 종이 뜨는 발로 얇게 떠서 말리고 다듬어야 한 장의 종이가 나온다. 전통 한지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 서리가 내린 후에 만든다. 여름에는 부채를 만들거나 닥나무를 이용하여 그릇이나 아기자기한 생활 소품을 만들어 낸다.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마불은 15년 전 벌랏마을에서 한지 뜨는 법을 배웠다. 벌랏마을, 문의면 소전리는 그가 자연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깃든 곳이며 메루를 만나 선우를 낳아 가정을 꾸린 곳이다. 마불은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종이 뜨는 일로 생계를 삼았다는 말을 귀담아 들었다. 명맥이 끊긴 한지 제작 기술을 복원하여 마을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계획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익이 되는 사업을 구상했지만 그보다 산골마을에서 대물림되는 폐쇄성을 예술적인 차원에서 해결해보고 싶었다.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가족이나 인척에 머물러 있는 관계가 외부로 확장되는 상태를 풍요라고 생각했다. 한지를 통해 문화를 복원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경제문제까지 해결하려는 통합적인 계획이었다.

지긋지긋하다며 종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하던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일을 시작했고,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벌랏마을은‘한지 테마마을’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꿈꾸던 변화와 풍요가 아니었다. 결국 선우의 교육문제를 핑계 삼아 벌랏마을을 떠나 읍내로 나왔다.

그렇다고 벌랏마을과 인연을 끊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도 볼일 보러 읍내에 나오는 벌랏마을 할머니들은 갤러리에 들러 놀다 간다. 마불은 언젠가 다시 벌랏마을로 돌아가겠지만 당장은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볼 심산이라고 했다. 한 해 두 차례 정도 해외 전시회를 갖는 마불은 해외에서도 이름난 작가이다.

올해도 독일과 러시아에서 초청을 받아, 얼마 남지 않은 전시회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전통 수제품을 전시하는 박람회에 초대를 받았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작품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짚풀이나 한지공예를 직접 보여주기도 하고 강연을 하기도 한다. 전시회에는 메루와 선우도 동행하여 같이 공연도 하고 한 두어 달 현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돌아온다.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메루가 명상을 마치고 나와 차를 대접했다.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마불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메루가 만났으니 천생연분이 아닐 수 없다고 했더니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했다. 셈에 약한 마불을 대신하여 갤러리 살림을 맡고 있는 메루는 머리가 복잡하다. 앉아서 책 읽고 명상만 하다가 몸을 굴려 살림을 하려니 그렇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수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메루는 어려서부터 초월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깊었다. 명동성당 뒤에 있는 전진상 교육관에서 들은 함석헌 선생 강의와 분도소책 <인간의 길>을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젊은 날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머릿속에서만 치열한 게 아니었나 싶다고 메루는 반문했다. 인도에 가서 깊은 명상 체험을 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명상센터를 열어 요가를 가르치던 메루는 벌랏마을에 와서야 몸을 쓰고 사는 법을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을 가라앉힌 고요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평온한 힘으로만 살아가려고 했지 노동을 통해 몸에서 나오는 힘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들에게 방청소나 땀을 흘리는 노동을 권한다는 메루는 밥하고 살림하는 일이 진정한 축복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마불은 메루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늦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그때 마불은 벌랏마을에 혼자 살고 있었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부침개를 부쳐 먹고 있던 마불은 지인을 통해 메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침개 한 접시 부쳐 대접한 게 인연이 되었다. 메루는 당시 그간 삶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을 하고 벗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릴 땅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그날 먹은 부침개 맛에 홀렸는지 아니면 마불의 순수한 삶에 마을이 쏠렸는지 발길이 자꾸만 벌랏마을로 향했다. 선우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같이 살기는 하되 그냥 도반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선우로 인하여 둘은 가족이라는 명확한 관계가 되었다.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선우는 두 사람의 삶을 확고히 땅에다 매어놓은 역할을 하였다. 벌랏마을에서 17년 만에 아이 울음소리가 울렸다. 마불과 메루, 선우가 벌랏마을에서 보낸 시간은 TV방송으로 소개가 되었고 <선우야 바람 보러 가자>(랜덤하우스, 2009년)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자연 속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선우는 마불 갤러리를 놀이터로 삼는다. 인터뷰 도중에도 동네 아이들이 수시로 들락날락 거렸다. 그 녀석들은 선우가 없으면 마불과 놀다간다.

마불은 모든 환경을 놀이공간으로 만드는 아이들의 탁월한 창의력을 작품 활동에서 많이 써먹는다. 아이들은 행동반경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논다. 아이들에게 게임하지 마라 스마트폰 하지 마라 짜증낼 일이 아니라 더 재미있는 놀 거리를 장만해 주라고 마불은 충고한다. 더불어 아이들이 터트리는 웃음이 주위뿐 아니라 우주에까지 영향을 끼치므로 아이들을 잘 놀게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마불은 선우가 돌잡이 때 한지를 잡았다며 앞으로 자신의 꿈을 이어가 주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꾸었던 꿈이 아들 대에 넘지 못하고 맥이 끊겨버리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자신이 벌랏마을에서 시도했던 일들도 같은 맥락이었다. 한지를 통해 이룩되었던 기술과 협업체제, 그로 인한 생산 소비구조와 생활 방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문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불과 메루의 꿈 이야기에 쏙 빨려들어 오랜 시간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그들이 꾸고 있는 꿈, 선우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의 방식은 다름 아닌 몸살림과 마음살림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생활이 아닌가 짐작해볼 따름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다시 손자가 그것을 이어받아 꿈을 실현하는 삶의 방식.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이만큼 찬란한 유산이 어디 있을까. 우리도 마불과 메루처럼 길게 꿈꾸며 사는 건 어떨까.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고진석 신부 (이사악,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기사 제휴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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