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원을 찾는 수행자, 시인 구상(具常) - 3

구상은 귀국 후에 글만 읽고 시 작업에 몰두했는데, 마침 폐병까지 결렸다. 전쟁 말기에 일제가 폐병에 걸린 시인마저 군대에 징집하려고 하자, 이를 피하고자 친일 조선인이 함경도 원산 지역에서 발행하던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했다. 이 시기를 두고 구상은 “목숨을 부지하려는 일념과 펜을 잡는다는 매혹에 식민지 어용(御用)신문의 기자가 되어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날마다 성전송(聖戰頌)과 공출독려문(供出督勵文)을 써 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쓴 ‘수난의 장’을 보면, 그는 자신과 조국의 상황을 정신적 가사(假死) 상태로 보았던 모양이다.

……
쫒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상여도가 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에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워싸고 빙빙 돌아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꼭 죽였다.

…(중략)…

꽃수레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예언처럼 이내 광복을 맞이하면서, 구상은 교회학교에서 일하다 인민투표에 나가 최고 득표자가 되었고,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도 맡게 된다. ‘주의자’라는 꼬리표가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구상은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된다.

해방 직후 구상은 원산문학가동맹에도 참여해 해방 1주년 기념시집 <응향>에다 ‘여명도’ ‘길’ ‘밤’ 등을 발표했는데, 이 시가 퇴폐적 · 환상적 · 악마적이라는 이유로 지탄받고, 반동시인으로 낙인찍혔다. 서울에서도 남로당계 기관지인 <문학> 3호에서 이 시를 비난했는데, 구상은 당시 소설가 김동리 등의 변호를 받았으며, 소설가 최태웅이 편집하는 <해동공론>에 그 경위를 밝히기도 했다.

양한모 선생이 해방정국에 좌익 활동을 했다면, 구상은 어쩔 수 없이 우익에 합류했다. 그의 정신적 고향인 덕원수도원이 북한 정권에 의해 몰수당한 사건, 그리고 그의 친형인 구대준 신부가 한국전쟁 직전에 북한에서 순교한 사건을 구상 역시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49년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하고 있던 중에 육군 정보국의 요청으로 심리전 요원으로 일하게 된다. 여기서 대북 살포용 <봉화>를 직접 편집 인쇄하고 북한 방송을 분석했다. 한국전쟁 일주일 전에 구상은 전쟁 발발 조짐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 당했다. 이를 분통해 하던 구상은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술집에서 6.25의 아침을 맞이하고, 6월 26일 수원으로 후퇴해 국방장관의 제1호 포고문을 작성한다. 한국전쟁 기간에 구상은 국민홍보지인 <승리일보>를 발간했으며, 1.4 후퇴 때는 대구에 가서 공군문인단과 육군종군작가단 출범에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이 당시 구상은 이종찬 · 이용문 ·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 장성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 한국전쟁 당시 부관학교에서 (사진 출처 / 구상문학관 홈페이지)

한편 휴전 이후 구상은 비록 적군 병사이었지만, 그들의 ‘풀지 못한 원한’을 자신의 것으로 감아 안고 서러워한다. 구상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의 체험을 바탕으로 <초토의 시> 15편을 썼는데, 시인은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으로 생겨난 ‘적군 묘지’ 앞에서 이데올로기의 허울 아래 희생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가톨릭적 윤리관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민족 동질성의 회복과 평화통일을 염원했다. ‘적군 묘지 앞에서’라는 시에는 그의 연민이 가득하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 <민주고발>, 구상, 남양문화사
한편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던 구상은 한국전쟁 이후 장면 선생처럼 이승만 정권과 결별한다. 구상은 당시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칼럼 ‘고현잡화’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다. 이 당시 쓴 글은 1953년 <민주고발>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판금령 조치가 내려진다.

그 후 구상은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문화부장으로 염상섭, 전진한 등과 명동 시공관 등에서 시국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1959년 10월 반공법 위반과 이적죄로 수감되어 15년형 구형을 받기도 했다. 구상이 이적병기(利敵兵器)를 북한에 밀송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은 구상 시인의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서 미제(美製) 진공관 2개를 사서, 동경대학에서 연체생물 연구를 하고 있는 사위에게 보낸 것을 구실삼아 반공법 위반죄로 시인과 친구를 잡아넣은 사건이다. 결국 구상은 8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4.19 직전 무죄로 석방되었다.

당시 구상이 자신의 최후진술을 시로 적었는데, “내가 만일 조국을 팔았다면, 그 앞잡이가 되었다면, 또 그 손에 놀아났다면, 재판장님! 징역이 아니라 사형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감옥에서 구상은 줄곧 현실에 나서느냐, 문학의 길에만 정진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문학의 길만 가기로 결심했다.

구상은 1959년의 감옥 생활 이후 그의 결심대로 일체의 사회적 직책을 맡지 않는다. 사회활동을 접은 구상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만족했다. 4.19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 민주당은 민의원과 참의원에 구상을 공천하려 했으나, 구상은 이 제안도 끝내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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