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간문화재 매듭장 김희진 율리안나 선생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인간의 삶을 매듭만큼 잘 표현해 주는 예술도 없다. 한 오라기의 끈을 반으로 접어서 두 가닥을 질서 있게 엮어서 균형을 맞춰 조여야 하나의 무늬가 살아난다. 이는 이웃들과 조화롭고 균형 잡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완성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전통 매듭 복원에 평생을 바친 인간문화재 매듭장 김희진 율리안나 선생. 미수를 앞둔 나이에도 단아한 자태를 잃지 않고 낯선 손님들에게 묘한 삶의 이치를 들려준다.

▲ 전통 매듭 복원에 평생을 바친 인간문화재 매듭장 김희진 율리안나 선생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김희진 선생이 1963년 매듭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너무 강렬했다. 혼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매듭이 평생의 과업이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여고를 졸업하고 집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아버님이 워낙 완고해서 저를 대학에도 안 보내고 좋은 가문에 시집을 보내려고 했거든요. 수공예에 관심이 많아 소일거리 삼아 선추(부채에 다는 추) 조각을 혼자서 배워보려고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었어요. 그때 민속학자 예용해 선생이 <한국일보>에 인간문화재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했어요. 거기에 선추장이 소개되었는데 후계자가 없다는 안타까운 기사였어요.

선생을 찾아가서 선추공예를 배우고 싶으니 주선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선추장이 전북 고창에 살고 있어서 대신 서울에 사는 매듭장을 소개시켜주겠다며 정연수 선생 댁으로 저를 데리고 갔어요. 그때 상여에 늘어트리는 대봉유소와 유봉유소라는 매듭을 처음 보았죠. 매듭의 결구와 강렬한 붉은 빛에 완전 반한 거예요. 뭐에 홀린 듯이 매듭을 배워나갔어요. 배운 것을 잊어버릴까봐 머리도 흔들지 않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김희진 선생은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매듭공예를 다시 복원했다. 결혼도 포기한 채 평생을 바친 노고의 결과인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다.

“매듭을 배우다 보니 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때는 인조견을 기계로 짠 끈밖에 없었으니까 빛깔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끈을 짜는 기술부터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남원에 사는 끈목장 박용학 할아버지를 찾아갔지요. 나중에 창경궁 장서각에 있는 고문헌을 찾아보니 끈목장이 아니라 다회장(多繪匠)이라고 이르더군요. 매듭에 쓰는 둥근 끈은 동다회 그리고 도포 가슴에 두르는 납작한 띠는 광다회라고 하는데, 광다회 짜는 기법이 전해지지 않은 거예요. 일본 여성들이 입는 기모노 가슴에 두르는 구미히모(組紐)라는 띠가 있다고 해서 일본까지 갔죠. 도쿄에 사는 인간국보 가와지마 도쿠다로川島德太郞 선생을 찾아가 그것을 제작하는 모습을 눈으로만 보고 배워서 광다회 짜는 기법을 복원해냈어요.

또 김입비 할머니에게는 술 만드는 기법을 배웠죠. 다른 인간문화재들은 스승이나 아니면 선조들이 하던 공예를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명맥이 끊기거나 여기저기 흩어진 기법을 복원하고 정리해서 이 분야를 만들어 놓았어요, 매듭 기본형 38종과 10종의 술 기법을 정리해 모아놓았고 16사, 24사, 28사, 36사로 광다회 짜는 기법을 복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승만 해도 다섯 분입니다. 1대 매듭장 정연수 선생, 조선의 마지막 다회장인 박용학 선생, 매듭장 강기만 선생, 매듭장 심칠암 선생과 김입비 선생의 솜씨를 이어받았어요. 그래서 남들이 나를 못 알아봐도 나는 다르다고 자부하고 삽니다.”

“실발이 고운 명주실을 골라, 맑은 정수에 고유의 물감을 풀어 오묘한 색상으로 물을 들이고, 그 아름다운 색조의 가늘고 부드러운 깁실(비단실)이 헝클어지지 않게, 오른쪽 왼쪽으로 한 가닥씩 꼬아 끈목으로 만들고 그 끈목으로 다시 정성스럽게 온 힘을 손끝에 모아 매듭을 지어 독특한 형태의 매듭작품을 완성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문화의 비밀을 터득할 수 있고, 생명의 비밀까지 느낄 수가 있다.” 이는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교수의 매듭에 대한 찬사이다. 김희진 선생은 매듭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넘어선 마력에 대해 말했다.

“한 오라기의 끈을 반으로 접어서 두 가닥을 질서 있게 엮어서 균형을 맞춰서 조이면 하나의 무늬가 살아납니다. 이게 내 기질에 맞았나 봐요. 그냥 미친 듯이 했어요. 맨 처음에 시작할 때는 매듭의 포로가 되어서 죽을 때까지 할 줄 몰랐어요. 남들이 모르는 희열감에 빠져 평생을 살았어요. 매력이라고 할까 아니면 마력이라고 할까 저를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이 있어요. 매듭이 표현하고 있는 균형미, 완성미, 절제미 같은 아름다움이 그런 작용을 하나 봐요.

하여간 매듭이 이 시대에도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합니다. 2010년에는 양주 필룩스 조명박물관에서 ‘빛과 매듭 하나 되다’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그때는 매듭을 가지고 획기적인 시도를 많이 했죠. 그중에 ‘SKY’라는 작품이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았는데, 제가 어렸을 적에 심부름을 가다가 본 잠자리 떼를 소재로 했어요. 하늘을 덮은 잠자리 떼와 석양이 어우러진 무서울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었어요. 하늘을 스크린으로 만들어 조명을 비추고 그 위에 잠자리매듭을 꽂아 잠자리 떼를 표현해 보았더니 그때 감흥이 살아나더라고요.”

▲ "한 오라기의 끈을 반으로 접어서 두 가닥을 질서 있게 엮어서 균형을 맞춰서 조이면 하나의 무늬가 살아납니다" 김희진 매듭장은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다고 설명한다. ⓒ이수용 테오도로 수사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매듭공예를 살려낸 김희진 선생의 삶을 뒷받침한 것은 신앙이었다. 반세기에 이르는 인내의 세월을 견디게 해준 동력인 신앙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는 저희 집안은 천주교를 믿지 않았어요. 큰 언니가 시집가기 전에 성당에 다니기는 했어요. 성당이 마을 한쪽 언덕배기에 자리해 있었어요. 언니 친구들이 제 머리에 미사포를 씌우고 예쁘다며 웃던 기억이 나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비자 교리를 받았어요. 고향 친구가 청파동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윤병현 안드레아 원장 수녀님을 소개해주었고 원장 수녀님이 홍은순 라우렌시오 부원장 수녀님께 예비자 교리를 부탁했지요. 고맙게도 부원장 수녀님이 저 혼자 두고 예비자교리를 가르쳤어요. 예비자 교리를 마친 후 수녀님이 써준 편지를 들고 가회동 본당에 가서 세례를 받았어요.

세례 받고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나가니까 수녀원에 간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아무튼 두 분 수녀님의 은덕이 커요. 나중에 원장 수녀님이 부산 오륜대에 있는 순교자 박물관에 전시된 가마에 매듭 장식을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미루다가 수녀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해드렸어요. 가마에 붙은 낡은 술을 제거하고 일곱 가지 색깔로 딸기술 240개를 만들어 달았죠. 그렇게 어려운 작업인 줄 알았으면 약속을 안 했을 텐데. 그래도 미뤄둔 숙제를 한 것 마냥 속은 시원해요.”

김희진 선생은 1984년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주례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매듭으로 장식한 제의를 증정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매듭으로 장식한 영대를 선물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영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몰라, 정릉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제의 제작실에 가서 보니 영대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제의에 맞춰 일습으로 제작되더라고요. 옛날 임금이 입던 곤룡포 모양의 제의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일단 비단 짜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석주선 선생님께 청해 곤룡포에 넣는 구름 문양을 알아내었고 로마에 계신 장익 주교님께 부탁해서 종이로 만든 교황님 옷본을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영대에 십자가 수를 놓고 매듭을 맺어 도포 끈처럼 늘어지게 한 황금빛 곤룡포 제의를 만들었어요. 시성식 날에는 여의도에 못가고 텔레비전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보았어요. 황금색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는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 당시까지 교황은 방문국의 전통의상을 제의로 입으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제의는 현재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으며 같은 제의를 제작하여 왜관 수도원에도 기증하였다.

“제가 봉헌회원이다 보니 왜관 수도원에도 제의를 한 벌 해드렸어요. 우리 집인데 안 해 드릴 수 없잖아요. 또 2.6m되는 나무에 매듭을 걸어놓은 큰 작품도 기증했어요. 제 분신이 거기에 있으니 왜관 수도원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지요. 요셉 수도원과도 인연이 깊어요. 요셉 수도원 터가 원래 성모병원장 박병래 박사님 소유였어요. 박사님 부인인 최구 여사가 제 대모이고 그분 따님이 제 친구예요.

대모님이 배 밭에 손님을 초대해 음식 대접하기를 좋아하셨는데, 태릉에 가자 그러면 저는 만사 제쳐놓고 따라나서곤 했지요. 부지깽이 같은 묘목을 심어 아이를 키우듯 그렇게 배 밭을 일구셨어요. 그때 주변에 불고기 집이 막 생겨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나중에 수도원으로 바뀌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대담을 마치며 김희진 선생은 자신의 올케이자 전수교육 조교인 김혜순 아녜스 씨를 소개했다. 이화여대 섬유예술과에서 자수를 전공한 올케가 시누이의 매듭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한국매듭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혜순 씨는 작년에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오는 허리띠들을 재현한 작품전을 열어 그 자질을 입증해 보였다. 놀랍게도 올케와 그의 남동생 역시 우리 수도원의 봉헌회원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인연은 잘 엮인 매듭처럼 쉽사리 풀리지 않는 법이다.


대담 정리 / <분도> 편집부

<기사 제휴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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