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인류 역사상 언제나 존재해 온 욕구는 거룩함에 관한 욕구이다. 영성사(靈性史)는 결국 인간의 의지로 거룩함에로 나아갈 것인지, 하느님 은총에 의지해서 거룩함에로 나아갈 것인지, 이 두 가지 다른 방법을 놓고,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예를 들어, 은총을 돈을 들여서라도 사야 하던 중세 교회의 행태를 놓고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했지만, 종교개혁의 다른 선두주자 캘빈은 강력한 금욕과 원리를 강조했다. 도대체 거룩함이란 무엇일까? 교회는 시대에 따라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으로 성인을 두고 공경한다.

종교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교회의 성인 공경은 대승불교 쪽의 보살(보디사바) 공경과도 흡사할 수 있겠는데, 성인의 이야기들은 항상 어떤 주제가 있어서 교회가 신자들과 통교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혹은 정치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을 아주 많이 하신 분으로 유명한데, 아시아 교회에 관한 관심을 반영, 그분이 시성하신 성인들 중에는 우리 한국 순교 성인들을 비롯해 베트남의 순교 성인들이 있다. 특히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마더 데레사를 시성하려고 모든 절차를 생략하는 무리수를 두시기도 했는데, 아직은 너무 이르다는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거룩한 사람, 성인은 누구인가? 무엇보다, 성인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거룩함을 산 사람이라고 하겠다. 또한 역사의 무수한 성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것은 그분들의 삶의 내용 혹은 거룩함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우리가 지금 맞닥뜨리는 현실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는가, 아닌가에 달린 것 같다.

가난이 만연한 글로벌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글라라 성녀

▲ 성녀 글라라(1194~1253). 이탈리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프레스코 벽화 일부, 시모네 마르티니의 작품(1312~1320년)
나는 개인적으로 성 프란치스코 성인을 참 좋아했다. 물론 그분을 아직도 참 좋아하지만, 지금은 글라라 성녀를 무척 가까이 느낀다. 아니 좀 더 분명히 이야기하면 그분을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한국 수녀원에서 쫓겨 나와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나는 매일 저녁 프란치스코 신학교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 성당에 놓인 글라라 성녀의 이콘을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학기 영성세미나 페이퍼의 주제를 글라라 성녀로 잡았다.

글라라 성녀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가난함을 통해 얻는 완전한 자유, 독립, 그리고 연대라고 할 수 있겠다. 글라라 성녀의 삶은 여성들의 기도 모임 그룹으로부터 시작된다. 13세기 중세 이탈리아에 도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가난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고, 다른 유럽 곳곳에서도 베긴회(Beguine) 같은 여성 단체들이 생겨난다. 이들은 사회의 정의에 민감했고, 그런 면에서 전통적인 수도생활과는 달리 사도적 봉사를 원했다. 그 당시 여성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비전이었다.

글라라 성녀도 그런 꿈을 꾸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 했다. 특히 그 시대에 풍미했던 영성은 가난한 그리스도를 따르고 모방하는 것이었다. 글라라 성녀가 뜻을 합한 사람은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 그들의 첫 공동체는 남녀가 함께 형제자매애를 나누는 사도직 공동체(Apostolic community)였다. 교회는 결국 이런 공동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프란치스코의 형제들만 사도적 봉사라는 특권을 얻고, 글라라는 관상을 강요받았다.

여기서 관상을 강요받는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설 수 없음을 의미했고, 여성 공동체는 모두 베네딕토회의 규칙을 따라야 함을 의미했다. 이에 대해 글라라 성녀는 의식적인 불복종(conscientious disobedience)을 한다. 그분의 불복종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첫 부르심인 가난을 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동체는 가난을 살기에, 지참금을 받지 않았고, 이것은 결국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의 딸이 아닌 가난한 여인들도 수도생활의 부르심에 응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또한 그분의 규칙이 이야기하듯이, 그들은 많은 시간을 단식했으므로 음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노동과 가난은 결국 이 여성들을 독립적일 수 있게 했다. 오늘날도 글라라 관상 수도회의 아름다운 풍습 중의 하나가 저녁이 되면, 가지고 있는 모든 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글라라 성녀는 자신의 꿈을 지켰고, 다른 여성들과 그 꿈을 나누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나누었던 가난에 대한 소명을 더 충실히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글라라 성녀의 공동체가 유럽 곳곳에 퍼져나갔고, 가난을 살았던 여성들과 교류했던 서신들을 읽어보면, 서로 함께 있지는 못했어도,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다운 연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분은 결국 계속 단식을 했고, 그가 쓴 가난할 자유과 권리를 규명하고 있는 수도 규칙은 결국 교황으로부터 인준을 받는다. 그분의 마지막은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겠는데, 교황의 방문을 받고, 인준 사인이 봉인된 편지에 친구하고, 바로 그 다음날 그분은 돌아가신다. 이렇게 하여 글라라의 규칙서는 여성이 쓴 최초의 규칙서가 된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가난한 사람, 가난한 환경은 어디에나 만연하다. 어쩌면 글라라 성녀는 이 시대에 가장 매력적일 수 있는 성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가장 철저하게 가난함으로써 여성들에게 독립을 가르쳐 주었고, 기도 안에서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선물, 가난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았던 성녀. 그리고 모든 여성들이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 그분은, 수도공동체 없이 수도생활을 고집하는 내게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소화 데레사가 걸었던 아름답고 작은 길

▲ 성녀 데레사(1873~1897).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선종 26년만인 1923년 시복, 이어 1925년 시성됐으며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선포되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거룩함과 관련하여, 20세기에 가장 인기 있던 성인, 소화 데레사를 빼뜨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프랑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아름다운 성녀. 내가 수도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읽었던 성녀. 종이 한 장을 주울 때도 그 희생을 봉헌하면 죄인이 구원된다던 성녀의 본을 따르며 수련자 기간 내내, 어떻게 하면 그 성녀같이 되나 골몰했다.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이 성녀를 연구하면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성녀의 꿈이었다. 성녀는 성서학자가 되고 싶었고, 무엇보다 선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가르멜 수도원의 회원이었던 그분은,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심장이 되기로 한다. 이 부분에 이르면, 나는 조금 서글퍼진다. 여성에게는 활동보다는 관상을 요구하는 것 같은 인상 때문에. 그러나 그분이 젊은 나이에 다다른 작은 길의 영성, 그 아름다움과 깊이를 보면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분이 가신 작은 길은 아름답다. 그러기에 나는 그 영성을 교회의 많은 남성들도 따라갔으면 한다.

이번에 나는 리지외에 순례를 다녀왔다. 그분의 관 앞에서 나는 기도했다. “데레사 성녀님, 당신이 20세기에 맞는 거룩한 삶을 사셨듯이 저도 이 시대에 맞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소서”라고. 21세기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나에게, 두 성녀의 삶은 또 한 번, 다른 여성들과 함께 연대하면서, 사랑이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작은 길을 기쁘게 살아가라고, 나를 부추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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