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20]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후 아크바르~.

새벽 어스름. 높이 치솟은 모스크의 미나렛에서 아잔(Azan, 이슬람교에서, 예배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큰 소리로 외치는 일)이 울려 퍼지자, 비로소 북아프리카 최대 이슬람 도시 카이로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무슬림들의 하루 생활 리듬을 결정짓는 시계소리와도 같은 아잔이 울려 퍼지자, 거리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대로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행인들의 모습이 빈번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를 관통하며 6,690킬로미터를 유유히 흘러온 나일 강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방에 이르면 두 줄기로 확연히 갈라진다. 로제타와 다미에타로 향하는 두 줄기 지류로 갈라진 나일 강 물줄기는 하구에 비옥한 삼각주를 형성하면서 지중해로 흘러든다.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삼각주 지대의 꼭짓점 남쪽에 위치한 카이로는 한때 “세상의 모든 길은 카이로로 통한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번성했던 중세 이슬람 문명의 통로였다. 카이로가 역사의 무대 위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시기는 파티마 왕조시대(서기 908~1171년)부터이다.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둔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 우마르(Umar, 서기 634~644년 재위)의 부하였던 아므르(Amr) 장군은 비잔틴 제국의 곡창지대인 바빌론 지역(현재의 올드 카이로)을 함락시키고 인근에 군영도시(軍營都市)인 푸스타트(Fustat)를 건설하여 이집트 통치의 거점으로 삼는다.

그 뒤 푸스타트 북동 3킬로미터 지점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파티마 왕조는 그곳을 미스르 알 카히라(Misr Al-Qahirah)라고 명명했다. 아랍어로 ‘승리자의 도시’를 의미하는 카히라는 이때부터 이탈리아어 ‘카이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이유브 왕조(서기 1169~1252년)를 개창한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Saladin, 서기 1174~1193년 재위)은 카이로 남동쪽 모카탐(Muqattam) 언덕에 거대한 시타델(Citadel)을 건설한다.

▲ 모카탐 언덕,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타델 전경 ⓒ수해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이집트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세워진 시타델을 거점으로 발달한 카이로는 맘루크 왕조(서기 1250~1517년) 시대에 동서 무역의 길목으로 크게 번창하여 바그다드를 대신한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노예 출신 술탄들에 의해 통치되던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서기 1517~1798년)에 의해 쇠락해버린 이집트의 국운(國運)과 함께 카이로도 잠시 침체기를 걷는다. 그러다가 18세기 말 프랑스의 침략(서기 1798~1801년)에 이어, 19세기 말 영국의 보호국(서기 1882~1952년)이 되면서 카이로는 근대적인 도시로 대폭 정비, 확장된다.

고대 파라오 문명과 중세 이슬람 문명이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도시 카이로는 그 특징에 따라 기자 피라미드 지구의 옛 유적지 카이로, 로마 통치 시대의 올드 카이로, 이슬람 통치 시대의 이슬람 카이로, 영국 통치 시대의 뉴 카이로, 네 지역으로 크게 구분되고 있다. 올드 카이로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유적 순례를 마치고 나자 이탈리아에서 온 가톨릭 순례자들은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지역으로 떠나고, 나는 바빌론 요새와 인접한 푸스타트의 아므르 모스크(Amr Mosque)를 방문하였다.

서기 641년, 이집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인 이 모스크는 이집트를 정복한 아므르 장군에 의해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아무르 모스크는 미나렛도 없이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쌓아올린 건물 지붕을 야자 잎으로 얼기설기 덮어놓았을 정도로 소박한 규모의 사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랜 세월 증축과 개축을 거듭한 나머지 시대별로 각기 다른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규모면에서는 카이로에 있는 모스크 가운데 단연코 최대급에 속한다.

아무르 모스크에서 나와 이집트의 민속촌이라 불리는 파라오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천천히 시타델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슬람 카이로 구역은 남동쪽 시타델 일대와 북쪽의 알 아즈하르 모스크(Al-Azhar Mosque) 일대로 구분되고 있다.

카이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모카탐 언덕에 자리한 시타델은 1176년에 착공하여 1183년에 완공한 견고한 성채다.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이자 반(反)십자군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살라딘이 십자군의 침범으로부터 카이로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이 성채는 성벽의 길이가 무려 2,100미터나 된다. 성벽을 쌓는데 필요한 돌은 주로 모카탐 채석장에서 채취한 돌을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기자의 피라미드에서 뜯어다 썼다고 한다.

1860년대에 케디브 이스마일(Khedive Ismail, 서기 1863~1879년 재위)에 의해 압딘 궁전(Abdeen Palace)으로 정부가 이전되기까지 이집트 정치의 중심지였던 이 성채는 불규칙한 석회암 언덕의 지형에 따라서 비스듬히 세워졌다. 현재 성채 안에는 1318년에 세워진 칼라운 모스크(Qala'un Mosque), 1528년에 세워진 술레이만 파샤 모스크(Suleiman Pasha Mosque), 1828년에 세워진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Mohamed Ali Mosque)가 있다. 또한 1949년에 이곳으로 이전된 국립군사박물관과 1814년에 세워진 알-가우하라 궁전(Al-Gawhara Palace) 등이 있다.

▲ 시타델의 상징,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수해

하루 다섯 번, 3백 개가 넘는 모스크의 크고 작은 1천여 개의 미나렛에서 일제히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모카탐 언덕을 향해 올라가노라니,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타텔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8백 년 동안 이슬람 통치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던 성채 안에 자리한 건물 가운데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는 규모면에서나 조형미에서나 단연코 돋보였다. 연필 모양으로 생긴 2개의 높은 미나렛과 거대한 돔이 인상적인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서기 1805~1848년 재위)는 19세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총독으로 부임해 와 실권을 장악한 뒤, 이집트를 근대적 독립국가로 발전시킨 왕이다. 1824년 무함마드 알리가 착공하여 그의 사후 9년만인 1857년에 완공된 이 모스크에는, 당시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려던 무함마드 알리의 야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때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오로지 군주인 술탄만이 두 개의 미나렛이 있는 모스크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는 의도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불문율을 무시하고 두 개의 미나렛이 있는 대형 모스크를 건립함으로써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술탄에게 간접적인 도전장을 보냈던 것이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안마당이 나타났다. 가로 52미터, 세로 54미터의 안마당은 하얀 대리석 기둥과 아치 위에 작은 돔 지붕을 얹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발을 벗어 보관함에 맡겨놓고 육중한 대리석 기둥이 도열해 있는 회랑을 따라서 맨발로 걸어가다가 보니, 안뜰 중앙에 놓인 아름다운 팔각형 분수와 고풍스러워 보이는 대형 시계탑이 보였다. 구리로 만든 이 시계탑은 프랑스 왕이 무함마드 알리에게 보낸 일종의 답례품이다.

▲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안뜰, 팔각형 세정대와 시계탑 ⓒ수해

1831년 당시 이집트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무함마드 알리는 룩소르 신전 제1탑문 좌우에 서 있던 오벨리스크 중 한 기를 프랑스의 루이 필립 1세(Louis-Philippe I, 서기 1830~1848년 재위)에게 선물로 보냈다.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이 ‘태양이 뜨고 지는 지평선’이라고 불렀던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는, 현재 파리 샹젤리제 거리 동쪽 콩코드 광장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맨 처음 프랑스에서 이집트로 올 때부터 이미 고장이 나 있었다고 하는 시계는 한창 보수 중이었다. 시침이 멈춰버린 시계와 함께 이슬람 사원에 필수적으로 부착된 세정대(洗淨臺)라고 하는 분수의 물줄기 역시 말라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사원 한쪽에 마련된 세정대에서 얼굴과 손발을 씻는다. 아랍어로 우두(Wudu)라고 하는 이 씻김 의식은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라고 하는 이슬람교의 성서인 꾸란에 기초하고 있다. 우두는 일교차가 큰 고온 건조한 사막 지역에서 주로 유목생활을 하는 민중들이 일상에서 터득해낸 생활의 지혜가 그대로 종교 의식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줄기가 말라버린 세정대를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모스크 내부로 들어가자, 이슬람 사원에 관한 나의 일반적인 상식을 불허하는 화려한 내부 장식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슬람교에서는 살아있는 존재의 형상화를 철저히 금지하기 때문에 모스크 내부에서는 다른 종교에서와 같은 성상(聖像)이나 성화(聖畵)를 일절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꾸란의 말씀을 문자로 표현하는 서예작품이 있을 뿐이다.

성상이나 성화 대신 꾸란의 내용을 대나무 붓으로 흘려 쓴 아랍어 액자가 걸린 소박한 기하학적인 문양과 꽃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아치형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과 모로코 풍의 돔 아래 걸린 샹들리에와 타원형으로 걸린 수백 개의 램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공조명은 가히 눈이 부시도록 황홀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 내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눈부신 조명 ⓒ수해

무함마드 알리 왕의 관(棺)이 안치되어 있는 모스크 내부에서 경건한 자세로 꾸란을 독경하는 무슬림 친구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찬찬히 내부 구조를 살펴보노라니, 문득 언젠가 옥스퍼드대학 구내 서점에서 구입한 한 권의 책이 생각났다. 영국이 낳은 저명한 종교역사학자이자 종교문화비평가인 카렌 암스트롱이 저술한 그 책의 제목은 <이슬람(Islam)>이다.

과거 7년간 가톨릭 수녀 생활을 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 저자는 “서기 610년 라마단 성월(聖月) 기간에 한 아랍인 무역상은 세계사를 변화시킬 큰 경험을 하게 된다”로 시작되는 이 책을 통해, 해박한 지식과 편향되지 않은 공정한 시각으로 이슬람의 영욕과 성쇠의 역사를 담담한 필치로 기술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생애와 위업에서부터 이슬람의 정치, 사회, 철학, 신학, 경제생활의 특징을 비롯하여, 종교로서의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일상생활이 어떤 식으로 관련되고 있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 속에서, 유난히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던 구절을 옮겨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이슬람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신의 존재를 찾는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역사적인 사명을 부여한다. 그들의 가장 주요한 의무는 남녀노소, 빈부 격차를 떠나 무슬림 모두가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 안에서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슬림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를 건설하고 살아가면서 그들은 신을 느낀다.

무슬림은 사회를 이상적인 이슬람 사회로 만들어 나갈 의무가 있으며, 이는 현실적으로 여러 정부 정책들이 종교의 교리와 떨어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구체적인 현실을 직시하여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신의 의미를 찾고 있는 반면, 무슬림들은 자신이 겪는 현실과 과거의 역사 자체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의 역사는 단순한 부차적 산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 역사의 신성화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두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 명상할 때의 자세로 모스크 바닥에 앉아,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국제정세의 심각한 변화가 있을 적마다 빠지지 않고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이슬람교의 주요 테제인 ‘인간 역사의 신성화’에 관하여 골똘히 사색하다가 보니, 누군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감았던 눈을 무섭게 번쩍 치켜뜨자, 뜻밖에도 어제 헬리오폴리스 지역으로 떠난 가톨릭 순례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사람이 빙그레 미소 띤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