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원을 찾는 수행자, 시인 구상(具常) - 2

구상의 자전적인 글 ‘에토스적 시와 삶’을 보면, 그의 문학적 자궁은 어머니였으며, 종교-철학적 자궁은 가톨릭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산 이씨 백두진사(白頭進士)의 고명딸이었던 어머니는 글과 붓이 능해서, 구상에게 어려서부터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가르쳤으며, 고시조와 이조의 평민소설, 신소설과 한글 토가 달린 <삼국지연의>, <수호지>, <옥루몽> 등 중국 소설을 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학교에 들어가서는 조선어나 글짓기에 능통했으며, 문학적 상상력도 뛰어났다. 글짓기를 하노라면, “온 세상 내 것 네 것 없이 골고루 잘살기 위해 돈이라는 것은 없애야 한다”느니 “염소의 뱃속에는 기계장치가 있어 그 똥이 검정 콩알처럼 동글동글하게 나온다”고 해서 교사와 동급생들을 웃게 만들었다.

소학교 6학년 때 애독하던 <카톨릭 소년>(북간도 용정천주교회 발행)에 ‘아침’이란 동요가 뽑히고, 중학 시절에는 <학우구락부>에 ‘하루살이’란 시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나는 장인적 의미에서 시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자신의 평가처럼, 그는 시보다 종교에 더 깊이 침윤되었다.

구상의 어머니 이정자는 이승훈 베드로의 집안이며, 아버지 구종진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구상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울산 부사, 큰아버지 가운데 한 분은 창령 현감, 또 한 분은 현풍 군수를 지냈으며, 구상의 아버지는 궁내부 주사였다. 아버지는 한일합병 이후 경찰학교에서 한문교관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당시 구상은 백동성당(현 서울 혜화동성당)에 다녔는데, 구상의 가족은 백동성당을 맡고 있던 성 베네딕도회와 인연을 맺게 되어, 함경도 원산에 진출하게 된 베네딕도회를 따라서 1923년 원산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원산에서 수도회의 요청에 따라 구상의 아버지는 원산 근처에 ‘해성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을 셋이나 세우고 운영했다.

▲ 구상 (사진 출처 / <한국대표시인 101선집 구상>, 문학사상사 중에서)
한편 구상은 형 구대준을 따라서 덕원신학교 중학 과정을 밟다가 3년 만에 그만두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그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간호할 사람이 자신 밖에 없어서였다고 하지만, 구상 자신은 “솔직히 말하면 나의 실존적 욕구가 성직자의 규범생활을 해낼 자신이 없고, 나는 어려서부터 레지스탕스 기질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구상은 곧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했지만 금방 퇴학을 당했다. 문학을 한다며 소위 不逞鮮人(불령선인 : 불평불만을 일삼는 조선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주의자(主義者)로 불렀지.” 당시 주의자(主義者)는 저항적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문학은 종교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다. “문학은 항시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제1의적인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이 내면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 ‘요한에게’라는 시에 반영되어 있다.

“너, 아둔한 친구 요한아!
가령, 네가 설날 아침의 햇발 같은 눈부신 시를 써서 온 세상에 빛난다 해도 너의 안에 온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느냐.
……
너, 영혼의 문둥이 요한아!
만일, 네가 네 안에 참된 기쁨을 누리자면 너의 오늘날 삶의 모든 것이 신비의 샘임을 깨달아 그 과분함을 감사히 여길 때 이루어지리니 그래서 일찍 너의 형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천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거두어 도둑들에게 주셨더라면 하느님은 진정 감사를 받으실 것을!’ 하고 갈파하셨더니라.”

이런 구상이었지만, 국내에서 전망이 보이지 않자 일본 밀항을 감행했다. 일본에서 생활비 마련을 위해 연필 공장 노무자 등 일급 노무자로 전전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시험을 쳐서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과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종교과를 선택한다. 동경 유학 생활 중 저항적 기질이 살아나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평등을 지고지순의 가치 중 하나로 삼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 성분도 소농(小農) 출신이라고 숨기게 되었다. 구상은 당시 “반신적(反神的)이게 되고, 니체에 심취하였다”고 고백한다.

자전적 시집인 <모과옹두리에 사연이 7>에 그때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때
‘라 로쉬코우’ 공과의 해후는
나이 안에 태풍을 몰아왓다.
선한 열망의 꽃망울들은
삽시에 무참히고 스러지고
어둠으로 덮인 나의 내부엔
서로 물어뜯고 으르렁거리는
이면수(二面獸)의 탄생을 보았다.

자기 증오의 밧줄이
각으로 숨통을 조여오고
하늘의 침묵은 공포로 변했으며
모든 타자는 지옥이요
세상은 더할 바 없는 수렁…

하숙방 다다미에 누워
나는 신의 장례식을
날마다 지냈으며
길상사 연못가에 앉아
짜라투쉬투라가 초인의 성에 오르는
그 황홀을 꿈꿨다.

그러나 동경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친이 죽고, 형님인 고대준 신부가 흥남성당에 부임하면서 집에 혼자 남게 된 어머니를 위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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