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지난달 독자께서 내게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메일 내용은 뜻을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 내용을 삭제 또는 수정하였음을 밝혀 둔다. 우선 메일 내용을 옮겨 본다.선생님께서 ‘냉담 신자’에 대해 꾸준히 써 주시고 있는 글들을 매번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사드려요. 저의
1. 며칠 전 한국 종교의 진로를 고민하는 종교인들의 간담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깨달음의 신비화’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였다. 우리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한다.이 말은 불교에서 출가자들이 깨달음만을 중시해 재가(在家) 신도들의 종교적 욕구를 돌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선(禪) 수행 외에 다른 일에는 전혀
1. 얼마 전 친한 목사님에게 목회 세습에 대해 묻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 ‘그 많은 신자들이 세습이 문제인 줄 알면서 어찌 그리 침묵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 목사님은 ‘사실 신자들은 누가 목회자가 되건 크게 관심이 없다. 어느 목회자든 몇 년 지나면 다 비슷해 신자들은 자신들끼리 맺는 관계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이달 19일(2015년 12월 19일) 이 ‘깊은 성찰, 열린 대화-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이 펼치는 소통과 담론’의 기치를 걸고 일 년여 준비 끝에 창간되었다. 필자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는 터라 독자들의 관심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위 주제를 골랐다.1. 10년도 더 된 일이다. (계간)에 원고를 써 준 일이 있다. 원고료를 준다기에 대신
1. 지난 주말 나에게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정의, 평화, 민주 가톨릭행동(이하 가톨릭행동)’ 회원 삼십여 명과 함께한 1박2일 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피정은 가톨릭행동이 생긴 이래 처음하는데다, 이 행사 전 6주간에 걸쳐 진행된 ‘관상적 활동’ 강좌를 결산하는 자리라서 의미가 컸다.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일 년 전 ‘일상 영성 수련모임’을 표방하
지난 주에 이어 성소 감소 현상의 원인을 계속 추정해본다. 가장 가까운 경험은 영미 계통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고, 가까운 나라 일본이 형태와 원인은 다르지만 역시 정체를 넘어 쇠퇴를 경험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독신생활을 하는 신원들만 오십 년째 줄고 있다. 이에 반해 신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늘어나는 신자들의 출신은 대체로 유럽출신의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제도다. 필자도 이십년 전에는 '제도 교회'라는 말을 많이 썼다. 사제들에게서도 이 제도에 대한 애증(愛憎)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인들도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제도로 보는 경우가 흔하다. "이천년을 유지해온 제도이니 대단하지 않은가? 유럽대륙에서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유일하게 무
며칠 전 조계사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25년 전의 명동성당을 만났다. 들머리에 사회적 약자들의 울부짖음과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은 플랜카드와 농성하는 이들의 천막이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명동성당 앞에서 자취를 감춘 이 모습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이곳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불교계 언론에 노출되는 기사들을 보아도 불교가 과거와는 많이 다
어제 필자가 초대받은 강의에서 참가자들의 나눔을 들은 소감이다. 주제는 '복음이 한국에 뿌리를 내려 토착화된 모습들이 어떤 것인가'였다. 한국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상호간, 이웃종교인 ․ 무종교인들과 상호작용(혹은 상호접변) 하면서 빚어낸 문화(통칭하여)들이 어떤 형태로 형성되어 있고, 또 어떤 양상으로 지금도 전개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것
작년 11월경 일 것이다. 신문에서 개신교 기독교윤리실천협의회에서 실시한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와 신뢰도 조사결과 보도를 본적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다뤄보고자 한다. 당시 조사결과에서 호감도는 천주교가 압도적인 비율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신뢰도(믿을만한 종교)는 불교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음
필자는 지금 강원도 깊은 산골에 와 있다. 본래 오늘 저녁에 돌아갈 예정이서 느긋하게 있었는데 일정이 바뀌어 이렇게 급히 산속에서 인터넷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곳은 은수자들이 사는 공동체이다. 이곳의 수도자는 아무런 경계 없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어쩌다 들른 나그네인데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생각하고 편안하게 맞아주시어 이곳에 머물고
지난 주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제 한분을 만났다. 강의 후 여러 신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마침 이 분이 필자 앞에 앉았다. 그런데 그분 앞에 배가 불뚝 나온 데다 조금 은 낡아 보이는 노트가 필자의 관심을 자극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둘이 나눈 이야기다. “신부님 그게 무슨 노트에요.” “아! 이거
필자가 속한 교구에는 깨어있는 사제들이 많다. 신생교구이고 사제들이 젊으니 그럴 것이다. 아니다. 젊다고 다 바른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우리 교구만 독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가끔 만나 이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올해 초였던 것 같다. 열심히 사는 어느 젊은 사제 한 분과 냉담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지난 주 필자가 소속된 학술단체 세미나에서 사회를 본 일이 있다. 주제는 요즘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종교 간의 대화였다. 세미나 내용이야 필자에게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끝나고 나눈 이야기는 여운이 많이 남았다. 나누고 싶은 것은 이 때 여운을 남긴 이야기이다. 저녁 식사 후 세미나 내용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
‘셀프 헬프 인더스트리(self-help industry)’ 이 말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필자도 얼마 전 인터넷으로 미국의 어느 라디오 방송을 듣다 알게 된 것이니 한국에서는 아는 분들이 많지 않으실 것이다. 그 방송 내용을 통해 이 말의 뜻을 유추해보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류의 책
한국 근대에 탄생한 민족 종교 세 가지가 있다.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다. 천도교와 증산교는 이대 또는 삼대 이후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였고, 원불교만 아직까지 분열 없이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백년 전에는 신흥종교였던 이 종교들은 종교연구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과연 대를 거듭하면 창시자와 창시자의 가르침이 일상화(routinization) 되는 것
지난 주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몇 달 동안 몰두하던 일이 끝나 몸과 마음을 쉬고 싶어서였다. 남들은 힘들게 산을 오르는 일이 무슨 휴식이 되느냐고 하지만 필자에게는 최고의 휴식이자 기도이다. 가을이 완연한 계곡을 따라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오색으로 물든 단풍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정상에 오르다보면 관상이 따로 없다. 이 기분은 경험해본 사
요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교회행사에 자주 참여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을 만나고 그분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교회 이야기,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등 종류도 가지가지다. 옛날 같으면 성격 탓에 가까이서 듣지 않았을 것들이다. 나이가 들었는지 이젠 그런 이야기들이 재밌고 꽤 영양가도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며칠 전 의 열렬한 독자로부터 따끔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글을 읽으면 알듯 모를 듯 한 것이 한마디로 야릇하다는 것이었다. 행간의 의미를 읽으면 “거칠고 투박해도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힘이 있고 뜻도 잘 전달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오로지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필자도 지금 같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나 잘못한 일을 두고 후회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떨 때는 그런 과거를 떠올리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필자는 사람이 모자라 이런 기억들이 유독 많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늘 후회 없이 멋진 모습으로만 남는 방법을 알고 싶은데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