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마태오복음 8장 19`-20절) 몇 년 전(아마도 1980년대 말 혹은 90년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8절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어느 때쯤, 자기가 ‘야고보’라고 주장하는 이는 세계 각처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글을 씁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주의 형제이자
최근 우리는 연일 토건자본과 국가기구가 공모하여(?) 벌인 대형사고들을 본다. 이들 건설프로젝트들의 비용이 수십조 원에 이른다. ‘건국 이래 최대’ ‘단군 이래 최대’ 등의 수사가 동원되었다. 이 정도 사업이라면, 긴 시간 숙고에 숙고를 거쳐 기획하여야 할 일이다. 규모가 큰 만큼 장기간에 걸친 검토가 필요함은 말
적의 밥을 먹은 베드로시리아 북단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는 사람들과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인데, 놀랍게도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귀화한 이방인들이 다수 포함된 공동체였다. 당시 유대교 회당은 물론이고 1세기 말까지의 예수 공동체에서 이런 풍경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또 한 사람의 연예인이 자살했다. 걱정이라곤 별로 없을 것 같은 밝고 선한 얼굴의 청년이 전기줄에 목을 매 자살했다. 매우 성공한 한류스타이고, 배우뿐 아니라 가수로서도 큰 성공을 거둔 이가 돌연 대중의 열망과 자기 자신을 영원히 분리하는 극단적 선택을 유서도 남기지 않고 단행했다. 벌써 죽음을 선택한 대중스타가 몇 명인가. 수를 헤아리기도 지칠 만큼 많은
레오 카락스(Leos Carax) 를 좋아하다 보니 그의 영화 제목이 익숙하다. 얼마 전 레오의 영화를 표절해서 ‘나쁜 피’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좋은 피’를 표제로 잡았다. 연작의 글로 기획된 것이 전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자가 ‘권력의 의도하지 않은 자기 복제&rsqu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룻기」 3장 5절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장례식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더는 없을 거야”라고 했다.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영웅이었고, 죽음으로 사회적 통합을 가져올 마지막
천주교회로 교적을 바꾸는 개신교도가 부쩍 늘어났다는 추정적 사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분석적 논의를 진전시키기엔 자료의 빈곤이 너무 심각하지만, 대체로 개신교와 천주교의 사회적 이미지가 그러한 변동의 한 요소로 작동하였을 것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사회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는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최근 천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