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참사람이셨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노래쟁이 김정식 아침노래 김정식 사/곡/노래 차가운 어둠을 뚫고 떠오는 햇님을 보라 거친 물결 피하지 않고 뜨겁게 타오르니 그 아픔 헛되지 않아 마침내 새 날이 오면 가슴 열고 큰 기쁨으로 아침을 맞으리
지난겨울 어느 날. 우리신학연구소의 박영대 소장이 내게 말했다. “형. 연구소 이사님께서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네팔 안나푸르나에 가기로 했는데 함께 가실래요?” “그래. 나도 함께 가고 싶다.” 그것이 다였다. 애초에 상근자들끼리 가도록 계획되었지만, 비상근 연구위원인 내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배려된 것이다. 처음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편협한 사고를 지닌 나는 어떤 경우에도 대중성에 휘말리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긍정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최다 관객동원을 이루어 흥행에 성공한 대부분의 영화를 개봉관에서 보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흥행에 실패한 작품이어도 좋은 영화는 찾아서 본다. 나중에라도 좋은 작품이라고 인정되면 보겠지만 남들이 좋다고
돌이켜 보면 이런 물욕 때문에 얼마나 자주 집착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느라 기운을 탕진했으며, 때때로 얼마나 많은 아름답고 소박한 이웃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을까? 한 번 욕심나는 물건이 있으면 그것이 내 것이 될 때까지 눈길을 주고 주변의 관심을 끌며, 그래도 안 되면 마침내 각개전투에 정면 돌파로 기어이, 아니 너무 힘들어서 기꺼이 선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
얼마 전, 대구에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주방에 걸려있는 손바닥만한 십자가가 눈에 뜨였다. 그 순간 내 목에 걸린(프랑스 어느 수도원에서 구한 후 너무나 맘에 들어서 이미 이십년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걸려있는) 나무십자가와의 차별성이 두드러져 보이면서 내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서로 허물없이 친하니까 저걸 달라고 부탁해서 뜻을 이루면, 평소
5년 만에 다시 찾은 프랑크푸르트 날씨는 거친 바바리아 땅의 환영인사를 대신하듯 연일 을씨년스럽고, 새벽과 밤공기는 몹시 차갑다. 행사 준비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초청 관계자와 시내로 나갔다. 오랜 만에 만난 화창한 날씨에 평일인데도 시내 곳곳은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아까운 햇볕을 놓칠 새라 노천카페에서 햇살 마사지를 즐기고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2009년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일하는 자칭 ‘명랑청년’ 김덕진 형제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랑모임을 주선하였다.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으면서 한 해를 돌아보며 따뜻한 얘기들을 나누는 시간이다. 올해는 무엇보다 용산참사 유가족들과의 연대를 우선으로 꼽을 수 있다.
방송을 위한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여러 악기를 연주하시는데 부모님은 어떤 악기를 전공하셨나요?” “제 아버님은 오뎅장수인데요.” 새마을운동으로 생긴 연쇄점 때문에 시골 오일장이 무너졌고, 장돌뱅이 식료품 잡화상마저 파산한 아버지는 무작정 상경해 영등포 무허가 시장 안, 남의 집 추녀 앞을 세내어
매달 한 번씩 우리신학연구소 식구들이 함께 등산하는 날이다. 100년 만에 가장 많이 왔다는 눈 속의 도봉산행은 환상 그 자체였다. 우이암(牛耳岩)에서 만난 가톨릭 교우들이 마침 우리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대림성탄 판공문제집 를 만났던 분들이어서 그것에 관해 얘기하다가 그분들의 손에 곱게 끼워진 묵주반지들을 보게 되었다. 문득 올라오다가
한낮의 태양이 좋았는지 잠을 자고 난 노인은 만족스럽게 보였다. 오래된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배 한 척이 그의 집 전부다. 누구나 그런 노인의 삶을 동경하며, 자신 또한 그렇게 살고 싶어 했다. 노인과 바다에게 이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영원의 숨결 같은 시간을 함께 향유했다. 그는 늘 독백처럼 노래했다. 약간의 빵과 포도주만 있어도 만족한 자신
1962년에 시작되어 1965년에 폐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구원에 관한 입장이 쇄신되었다.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기존의 구원관(구원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구원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쇄신을 이루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있었지만 칼
대림절이 시작되는 11월 28일 토요일부터 12월 중순까지 하루도 쉬지 못했다. 광주 부산 여수를 비롯하여 수도권 여러 본당의 초청으로, 미사 중에 강론 대신 대림특강을 한다거나 대림피정 강의를 하러 다니느라고 입안이 다 헐어 나을 새가 없었다. 하루에 한 번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오전에 강화지역 구역장 반장 피정에서 강의를 하고, 점심을 차에서 해결한 채
명동성당 앞 거리공연은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돕기 위한 노래공연’이다. 1985년 겨울부터 박준 토마스 형제가 시작했고, 1987년 겨울부터 그를 돕는 마음으로 내가 함께해 왔다. 처음에는 주말을 뺀 주5일을 하다가 월, 수, 금요일 격일제로 바뀌었고, 다시 수, 금요일로 바뀌었다가 요즘엔 월요일 저녁에만 한다. 매일 밤
2주일 전에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문규현 신부께서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은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 상태는 아니라고 하여 가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가톨릭뉴스 에서 인터뷰하러 가는 편집국장과 기자를 따라 병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우리의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이
한 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쓴 강론을 매주 내게 보내오는 친동생 같은 신부가 있다. 몇 주 전에 보내온 의 내용은 요즘 내가 강의 중에 가장 자주 화두로 삼는 것인데 그 일부를 소개한다.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한 인격의 자아는 선과 악에 대한 구별과 판단 기준이 되는 사람들(일반화된 타자 generalized o
순교 하나. 9월 12일은 놀토(노는 토요일)였다. 가을 햇살이 따갑게 비쳐드는 이른 아침에 아래층에서 한 바탕 소동이 일었다. 막내 이랑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고, 달래는 엄마와 나무라는 오빠 이삭의 음성이 뒤섞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용을 잘 듣고 정리해 보니 이렇다. 고딩 1년인 이랑에게 짝꿍이 문자를 날렸는데 ‘새벽 4
서울 근교 어느 본당에서 이라는 열린 강좌를 끝냈을 때 중년부인이 다가와서 딸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오빠. 그 동안 잘 계셨어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젊고, 목소리도 그대로네요.” “성자씨 아니예요? 잘 지냈어요? 너무 소식이 없어 궁금했어요. 수희가 이렇게 예 쁘게 컸나요? 엄마보
배보다 더 큰 배꼽 “에이 수박이 너무 맛이 없다. 아빠.” “뭐라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박이야. 폐지 줍는 할머니께서 사 오신 거라구.” “세상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네. 그거 아무리 많이 모아도 수박 한 통 사기 어려운데.” 올해 팔순이신 아버지께서 동네에 불쌍한 할머니가 있으니
여름보다 더운 당신 “비가 또 오나요?” “또 오다니. 계속 내리던 중에 잠시 그쳤을 뿐인데.”“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장마철이니 비가 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거지. 우리나라는 6월 말부터 8월초까지는 장마기간이어서 비가 내리는 것이 정상인데, 고맙게도 잠시 멈춰 준거야
1. 주변머리와 속알머리 일년에 서너 번씩 미용실에 간다. 이발소보다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때문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앉아서 주고받는 일상의 얘기들이 정겹다. “누가 오십 대라고 하겠어요. 얼굴을 보면 딱 삼십 대예요.” “이렇게 머리를 자르고 나면 동네 할머니들이 언제 군대 가느냐고 묻는다니까요.”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