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바람이 불고 하늘은 파랗다. 산의 색이 변하고 있다. 그 자체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그 일상의 단순한 행복도 사치처럼 여기게 하는 이 사회가 점점 두렵고 무서워진다. 올여름,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드러나게 해준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의 타워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하는 김진숙 씨와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의
얼마 전 강정을 방문한 광주대교구 김희중 대주교는 구럼비 해안가에서 강정마을 주민들과 제주교구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80년 5월은 고립된 섬이었다. 지금 강정은 고립된 섬이다. 같은 마음으로 연대하며 평화가 필요하다.”‘고립된 섬과 연대’ 그렇다. 지금 강정의 주민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너희는 이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마태 21,13) 월요일 아침이면 군산에서 상경하는 신부님의 메시지를 받는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다. ‘죽어야 산다’는 비장함이 너무 무겁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고 누구나 한번은 태어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면 죽는 것 역시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말한다. 절망은 희망의 반대말이다. 절망은 인간이 신과 단절할 때 나타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신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희망을 받지 않고 절망에 빠졌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거미형’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 가리라(욥 1,21) 내일이면 추석 연휴이다. 저마다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떠난다. 가고 싶어도 고향을 찾아 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3년이 훨씬 넘게 싸우고 있는 우리 동네 콜트악기 노동자도 그러할 것이고 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러할 것이고 다시 깃발을 올린 기륭전자,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인 동희 오토노동
매년 여름이면 만나는 노동사목 출신 선후배들 수련회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있었다. 밤새 쏟아지는 계곡 물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 저 밑에서 너른 강이 되고 다시 바다로 이어져 대한 하나로 모아지는 자연의 모습은 상식이고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산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는 상식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이다. 그래서 상식에 반대되는
몇 년 전 일이다. 2007년 10월 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삼성의 비리를 제보하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찾은 김용철 변호사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들어줄 곳은 사제단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변해 줄 곳은 사제단이라고 그는 찾아왔다. 그는 왜 사제단을 찾았을까? 한국사회의 언론, 검찰, 권력의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선수행(禪修行)을 하던 스님이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세상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산중에서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악행을 보면서 자신의 몸을 공양했다. 그가 세상에 던진 마지막 호소는 짧았다. 이명박 정부에게 4대강 사업폐기, 부정부패 척결,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한 것이 유서의 전부였다. 평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무임승차’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압축적인 상징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하철에서 무임승차 하면 경범죄에 걸려 벌금을 낸다. 그러나 거대한 한국 사회라는 기차에는 벌금이 없는 것을 알고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앞과 뒤가 다르다. 보이는 것에는
새해가 되고 눈이 세상을 덮었다. 지칠 줄을 모르고 달려온 세상의 속도는 한순간에 정지되고 말았다. 자동차도, 전철도, 비행기도 한순간에 멈추어 섰다. 사람들은 불편했지만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속도에 몸을 실지 않으면 한시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쌓인 눈으로 무한 속도가 거북이걸음으로 변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분다.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이 불안하기도 하고 처량해 보이기조차 하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한국사회는 마치 안과 밖이 철저히 분리된 채 소통이 블가능한 냉동 창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회가 육중한 쇠문이 닫히면 실날 같은 빛마저 들어올 틈이 없이 차단당하고 모든 생명이 한순간에 얼어붙는 냉동 창고 같다면 너무 과잉된 감정일까? 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촌각을 다투며 공권력과 자본과 전쟁을 치루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나는 한가하게 동네 꼬마들을 데리고 며칠 밤을 지리산에 있었다. 마음의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는 없었지만 당장 내려가 그곳으로 달려갈 용기도 없었다. 그저 속세에서 벌어지는 이 기막힌 상황을 생각하며 산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애써 찾아보려 했을 뿐이
5월 3일 한 노동자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화물연대 노동자인 박종태(39) 씨다. 그가 원한 것은 대한통운의 78명 해고자 복직이었다. 용산참사를 당한 유가족이 박종태 씨의 부인을 위로하러 대전으로 내려가 만나는 모습이 인터넷 뉴스에 실렸다. 같은 상복을 입고 그 유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린다. 참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아
인천 성모병원 노사갈등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그런데 갈등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용자측은 공세적이고 노조는 수세적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단체협약 해지, 고소고발, 손해배상청구, 재산가압류, 조합탈퇴 종용과 조합원 감소, 노조 전임자 해지, 임금동결등 이 정도면 노조를 사람으로 비유했을 때 거의 밥도 물도 먹을 힘도 없어 고사 직전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