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대를 특징짓는 갖가지 형태의 염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정치염증이다. 염증이란 “어떤 장애성 자극에 대한 생체조직의 방어반응”을 뜻한다. 즉 비정상적인 현상이 거듭되는데서 오는 피곤함과 짜증이 불러일으키는 무기력한 반응이 염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 반응은 결국 반응을 일으키는 주체의 어느 한 구석이, 아니면 가장 중요한
지난 7월1일부터 15일까지의 보름. 그 기간은 내게 15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뛰어넘는 압축된 체험을 안겨주었다. 한마디로 결론짓는다면, ‘지금 여기’라는 현재, 그 순간의 의미를 절감하면서 ‘순간에서 영원으로’가 아닌 ‘순간 즉 영원’을 맛보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현재
풍요 속 빈곤, 무늬만 신자? 천주교 신자라면, 매일같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그 뜻을 오늘 내 삶과 일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타성 때문일까? 교회 안팎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말한다. 그렇지
8월..... “100년 전 일본에 나라를 강탈당했던 것도 8월이요, 35년 후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날도 8월이었다.” 라는 탄식이 도하(都下) 모든 신문을 뒤덮고 있다. 그 100년의 세월 동안 우리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없었다. 평화를 누릴 자격도 힘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100년 전 8월2일. 이날은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체제가 등장하여 사회적인 충돌양상이 고조되던 1972년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더욱 깊이 고뇌하면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주여 우리 겨레를 돌보소서. 비록 이스라엘과 같이 선민(選民 필자 註)은 아니오나 역시 당신의 백성이 아니옵니까? 우리 길을 밝혀 주소서. 무엇 때문에
나는 1950년 경인년생, ‘6.25동이’ 이다. 전쟁의 상흔을 깊이 간직할 수밖에 없다. 너무 어렸었기에 전장의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어린 핏덩어리를 껴안고 사선을 뛰어넘었던 고초가 얼마나 크고 처절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2010년 6월은 ‘6.25동이’에게 그 의미가 각
김 추기경은 3‧1 명동사건으로 구속된 문정현, 함세웅, 신현봉 신부 등을 위한 교회 전체의 관심과 기도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몸소 법정에 나아가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국내 인권상황과 정치, 그리고 주한 미군철수문제와 국가안보에 관한 판단은 엄격한 구분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미국 노트르담 대학이
7.0이라는 숫자로 표시된 아이티의 강진은 인류 종말의 예표인가? 아니면 인류 역사에 잊혀졌다가 발굴된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던 인류 역사의 한 편린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 엄청난 비극과 혼돈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신에 대한 두려움과 운명의 끝자락을 보는듯한 공포의 전율을 느낀다. 지구촌시대를 실감케 하듯 실시간 중계로 끝없이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새천년 열렸어도 평화는 없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21세기 새 천년은 1,2차 세계대전과 동서냉전의 이념적 갈등으로 갈갈이 찢겼던 20세기의 비극을 마감하고 드디어 평화의 새 세기를 열게 될 것이라던 인류의 희망이 불과 몇 년 만에 얼마나 무참히 좌절되었는가에 대한 끝없는 절망감을 이 기사는 너무도 잘 표현해냈다
제42회 평신도주일 강론자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를 보면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란 점이 강조되어 있다. “자발적인 교리 연구를 거쳐 1784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 입교한 후 서울에서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고 모임을 가짐으로써 마침내 평신도들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