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주님“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주님, 교회가 열어 갈 새로운 길 위에서 사랑과 헌신으로 함께하는 모든 여성을 기억하시어 더욱더 풍요롭고 복된 교회 공동체를 이룩하는 길 위에서 더 많은 여성의, 더 다양한 참여로 나아가는 여정에 부디 함께해 주소서.”아마 모두에게 낯설 이 기도는, ‘교회와 통합적 생태를 위한 새로운 길’을 주제로 열린 아마존 주교 시노드의 결실을 기억하기 위해 지난해 겨울, 필자가 근무하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에서 만들어 배포한 기도문이다. 당시에는 아직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사랑하는 아마존’
모든 것이 낯선 이 시기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몰랐다. 지난 2월 말 나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2월 15일 출국할 때만 해도, 확진자 수는 서른 명에 미치지 못했다.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보이진 않았고, 목적지였던 야마구치현에는 아직 단 한 명의 확진자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 사이 상황은 급변했다. 2월 20일 한국 내 확진자가 100명을 돌파했고, 대구대교구에 속한 부모님은 공동체 미사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앞에 닥친 봄이 어떤 모습이 될지
새로운 세상의 문턱에서, 신앙과 정치를 생각한다다시 4월 16일이 지나간다. 어느새 6년이 흘렀고, 스물다섯 대학원 신입생이었던 나도 이제 30대가 되었다. 희생된 아이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들 또한 2014년의 내가 머물렀던 삶의 시간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덧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남기고 간 무수한 질문 가운데 어떤 일부도 오롯이 대답해내지 못했다. 무거운 책임감과 미안함은 그대로 남아 온종일 SNS 타임라인은 노란 추모 물결로 채워졌다. 동시에 올해 4월 16일은 21대 총선 다음 날이었다. 전날 늦
조선학교는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다. 일제강점기 끌려가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아야 했던 동포들은 아이들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 민족학교를 세웠다. 조선말을 가르치는 ‘국어강습소’로 시작한 조선학교는 일본 전역으로 퍼져가 해방 후 70년이 넘게 재일조선인들이 배우고 자란 터로 동포 사회의 구심점으로 남았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는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배척했고 때로는 냉전의 도구로 이용했다. 재일동포들은 이렇게 일본과 한국 사회 모두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해야 했다.지난 몇 년 사이 한
지난 연말을 타이에서 보냈다. 치앙마이에서도 두어 시간 흙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타이와 미얀마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 카렌족 마을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청년들과 함께한 캠프의 일환이었고, 나는 미얀마에서 온 청년 한 명과 마을 가장 꼭대기, 산 위에 있는 작은 나무집에서 사흘간 홈스테이를 했다.마을에는 전기가 없었다. 와이파이는 물론이고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아 가지고 간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었다. 홈스테이를 위해 마을 곳곳으로 흩어진 청년들은 서로를 만나고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친구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이웃들은
1891년, 교회가 마주한 새로운 사태“참으로 부당한 일은 인간을 마치 이윤 추구를 위한 물건처럼 마구 다루는 것이고 오직 노동 기술이나 노동력으로써만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득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마치 물건 취급하듯 무차별 혹사시키는 악덕 기업주들의 인권 유린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이다. 과중한 노동으로 정신이 무디어지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도 인간성도 용납하지 않는다.”구구절절 타당하게 느껴지는 이 문장들은 놀랍게도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발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