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요”라고 인사를 드리는 그런 시간이 왔다. ‘벌써’라는 말과 ‘이제’라는 말을 동등한 값어치로 간직하고 는 일단 막을 내린다. 불평의 대상일 뿐 비평의 대상이 아닌 듯이 보였던 교계언론에게 비평이란 잣대를 들이대고자 시도한 것이 지난 2007년 8월 5일이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카페 구석방에서 가톨릭뉴스
한국교회의 원죄는 '친일'지난 2007년 8월 5일 「김유철의 미디어흘겨보기」란 이름으로 시작한 교계신문 톺아보기는 2년 4개월여의 소임을 마치고 대림시기를 앞둔 11월 22일 막을 내린다. 그동안의 마무리는 다음 주 할 예정이다. 그것을 미리 말하는 이유는 이번 주의 글 역시 마무리의 일단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늘의 원은총(Orig
아시파(AsIPA) 최종선언문 이번 주 교계신문이 공통적으로 1면에 올린 주요기사는 제5차 아시파총회에 관한 것이다. 명칭이 낯선 아시파(AsIPA)는 ‘아시아의 통합사목적 접근’의 영문줄임말이다. 아시파는 아시아 교회 소공동체 사목 연구와 보급, 소공동체 관계자 네트워크 구축 등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5차 대회의 주제는 ‘나
안중근 도마민족에게 있어서 ‘안중근’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세대 차이와 관계없이 코흘리개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를 민족의 의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념적 대결과 관계없이 남북한 모두 그를 독립전쟁의 고귀한 희생으로 여기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안중근 의사가 종교적으로 천주교인임을 교회 관계자들은 언젠가부터 조심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물론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니성경 중에서 잘 안 읽혀지는 성경이 요한묵시록이다. 전례 안에서 만날 기회도 적고, 묵시문학 표현이 비현실적(?)이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안에도 새길 말씀이 나름 있다.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전교의 달과 전교주일을 맞아 교계신문들은 주제에 걸맞은 특집기사를 기획했다. 은 1면 톱으로 이웃종교인 ‘정교회’ 초대 한국대교구장의 인터뷰기사를 파격적(?)으로 편집하여 신선함이 더했다. 이어 교황의 담화문과 함께 ‘복음의 행복 느끼고 전교에 앞장서자’는 사설을 실었다. 역시 1면 톱으로 전교주일에
침묵에 대한 참회언론이 스스로 자신들의 침묵에 대해 참회를 하는 중이다. 물론 교계언론이 아니라 세상의 언론이 하는 일이다. 언론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침묵의 카르텔’( 10월 2일)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부끄러운 언론’( 10월 1일)이란 회초리를 들었다. 두 신문 모두 같은 사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교계신문이 휴간이기에 교
블로그(Blog)라는 미디어도구가 발명되면서 본격적인 인터넷 논객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블로그란 말은 더 이상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인터넷을 의미하는 '웹(web)'과 자료 또는 일지를 뜻하는 '로그(log)'의 합성어인 '웹 로그(weblog)'의 줄임말”이라고 풀이(브리태니커사전) 하지만 “사이트 운영자가 취재· 편집·
한국천주교회를 총괄하는 핵심은 역시 한국주교회의다. 흔히 영어 약칭을 사용해 CBCK로 불리는 한국주교회의는 교회법적으로 “교회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선익을 더욱 증대시키기 위하여 해당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한 어떤 사목 임무를 특히 시대와 장소의 상황에 적절히 적응시킨 사도직의 형태와 방법으로 법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수행하는 한 국가나 특정 지역
두 교계신문에서 각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관점이란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물론 공통된 한 문제에 대한 목소리는 거의 대동소이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두 신문이 모두 교회의 기관지임을 자임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거야 스스로가 정한 정체성이기에 독자들로서는 좀 갑갑한 면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보여 주는 대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친일 문제를 재론하게 된 것은 유감이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진정된 것은 아니지만 다시금 교계신문을 통해 눈앞에서 반복되는 일을 본다는 것은 마음 편안한 일이 아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스스로 지은 잘못이 원죄 아닌 원죄가 되어감에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교회구성원으로서 마음이 한없이 불편하다.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시절 교회의 친일, 좁게는 노기남 대
롤랑 조페 감독이 새로이 만든다는 영화제목이 'There be Dragons'인 모양이다. 롤랑 조페 감독은 천주교신자들에게는 당연히 1986년 작품인 '미션'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는 그 영화 외에도 '킬링필드' '주홍 글씨' '시티 오브 조이' 등으로 한국의 영화 팬들에게는 꽤 이름 있는 감독이다. 이번 주 의 9면에는 외신
이번 주 교계신문 모니터링을 하려는 참에 교계언론의 ‘미보도’ 혹은 ‘기사가치’ 판단에 관한 것이 이슈화 되었기에 그 문제에 대해 말하려한다. 원래 싸움이나 다툼에 있어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밉다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이번 비평은 미운 일을 자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에 있어 선후는 가려야 하고, 시비는 바로 해야 하기에 필자의 의견을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 중의 하나가 일본의 한국지배시절 이야기다. 이른바 우리민족이 남의 민족에게 식민지로 살았던 치욕의 기간이 있었다. 36년간 있었던 역사의 뒤안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있을까 만은 그 중에서도 식민기간동안 민족을 배반한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규명은 정부수립 60여년이 지나도록 요원한 실
보도의 방법이야 신문사의 편집국은 물론이지만 일선기자들이 선택할 문제다. 그러나 매주 다양한 뉴스에 한정된 인원으로 뛰어다니다보면 그 지혜로움이 떨어질 수밖에는 없다. 사람과 구조가 가진 한계점 앞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부끄러운 법이다. 그러기에 근간에는 여러 신문사들이 독자위원회 혹은 지면평가위원회를 구성해서 입에 ‘쓴 약’을 달라고 자청하기도 한다.
일 년에 한번 씩 맞이하는 여름휴가는 직장인들에게는 사뭇 기다려지는 일정이다. 프랑스사람처럼 철저한(?) 휴가를 즐기지는 못하지만, 또 때로는 아이들이나 주위의 등살에 마지못해 떠나는 일정도 있지만 휴가는 아무튼 스스로 한가로워지려는 것일 게다. 휴(休)라는 말이 나무에 기대어 쉬는 사람을 형상한 글자라고 말하듯 휴가는 사람을 재충전하기에 좋은 기회임은 틀
100번째 신문비평이다. 지난 2007년 8월 5일 「미디어흘겨보기」란 이름으로 글을 시작한 것이 벌써 꼬박 두 해가 되었다. 교계신문들과는 ‘고운 정’ 없이 ‘미운 정’만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 100주간이 흘러갔다는 것 또한 교회언론의 한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100주간이 흘러가는 동안 사회는 예전보다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부분 그리스도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에 있어서 교황 다음 가는 성직자는 추기경단의 일원들이다. 그들은 다른 주교들에 비해 교황 선출권을 가짐으로서 월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문헌에 의하면 추기경들은 교황청의 여러 의회에 배속되어 교황의 왕자로서 전하(殿下)의 존칭으로 호칭된다. 또한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들은 물론이고 바티칸밖에 거주하는 추기경들도 모두 바티칸시국
일단 공부하는 의미에서 를 펼쳐보자. 《교황》이란? ‘명칭의 원어 Papa(아버지)는 본래 지역 교회의 최고 장상(주교, 대수도원장, 총주교)을 부르던 말인데 중세 초기부터 차츰 로마의 주교에게만 사용하게 되었다. 교황은 로마교구의 교구장 주교이며 세계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현세 교회의 통괄적 최고 사목자이다.’ 《교황의 직무》는? ‘진리를 가
눈앞에 올 것이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수없이 우리 앞을 지나간 일들이다. 그것을 이번에 서울대교구 가좌동성당에서 제대로 ‘물꼬’를 튼 것이다. 아니 ‘물꼬’가 될 것인지의 여부는 교회언론과 교회 구성원들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거기에 따라서 이번 문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지닐 것이며, 또한 앞으로 벌어질 유사한 문제에 있어서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