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앙의 해’를 맞이해 신앙쇄신을 통한 ‘교회의 복음화’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교도권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믿고 나 을 꼼꼼히 읽자고 제안하고 있다. 한편 가톨릭 사회교리를 예비자교리서에 반영하자는 제안이 주교회의에 제출되었다.교회가 그만큼 의미심장하게 세상 안에서 복음적 진실을
가톨릭일꾼운동은 1933년 미국에서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시작하여 벌써 80년 가까운 이력을 지니고 있는 ‘가톨릭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대중적 영성운동이다. 이들은 이란 신문을 발행하며 도시와 시골에 환대의 집을 건립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전쟁과 인종차별, 여성문제와 노동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관하여 원탁토론을 통하여 식별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돌입하면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 속에서, 1949년 뉴욕대교구의 임금동결에 반대하여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하자 스펠만 추기경은 인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았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추기경은 인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신학생들을 시켜
도로시 데이는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톨릭일꾼의 집을 방문하고, 대공황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록하고, 집회에서 강연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연좌농성에서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도로시는 노동문제가 발생하거나 부당한 조건에 항거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을 도울 방도
자비의 실천, 환대의 집‘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 피터 모린은 5세기의 교회 공의회가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마다 ‘환대의 집’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기뻐했다. ‘환대의 집’은 가난한 이,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등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내가 낯선 사람이었을 때 네가 받아들였다”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 푸른 혁명(Green Revolution) 위해 신문 발행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은 1877년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의 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형제회’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서 가톨릭 인민주의를 주장했다. 1909년 아메리카로 건너와 캐나다에서 농장경영에 실패한 뒤에 불법으로 국
오, 함께 계시는 하느님,저 혼자서는 더 깊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은 저를 보호하고 지도하는 안내자로서 저를 안아주고 지지해주는 사랑의 동반자로서 도전하면서 위로해 주는 지혜로운 분으로 저와 함께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제가 제 뿌리를 찾으려고 더 깊이 들어가려 할 때,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감싸주십시오.두려움과 불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유토피아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경제가 성공한다 해도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적 방식의 정책이 설령 성공한다 해도 가난한 이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 역사와 함께 추락의 역사는 늘 일어날 것이다.”여기에서 가난함이란
도로시 데이에게 삶이란 하느님의 영과 함께 걷는 흥미로우면서 진지한 사랑의 여정이었다. 그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의 그룹 안에 끼어 넣으려고 애쓰지 않았고 사업의 효율성을 위하여 기관을 설립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톨릭일꾼 신문을 만들 때에도 환대의 집을 운영할 때에도 우려와 관심을 가졌으나 불확실한 현실
가톨릭 일꾼들은 교회의 평신도로서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소명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평신도 사도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계발하고 있다. 우리는 들판과 공장에 나가 일을 하면서 새로운 동료 일꾼들을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긴 외로움에서 도로시 데이는 일꾼들의 소명을 ‘사도적 부르심’으로 해석하였다. “교
“우리 둘 중에 누구에게 말하려고 기다립니까?” 도로시 데이의 인간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볼 수 있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로버트 콜스는 자신이 대학생 시절에 처음 가톨릭일꾼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경험을 들려준다.그가 일꾼공동체 집에 왔을 때 마침 도로시 데이는 술 취한 한 여성과 식탁을 사이에 두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는 꽤 길어졌는
교회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는 집 도로시 데이는 교회에 앞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기를 갈망하였으며,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이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도로시 데이는 회심할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가난하고 정결하며 순명하기를 바랐다. 나는 살기 위하여 죽고 싶었고,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고 싶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사랑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사목헌장을 통하여 평화 문제에 관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인류는 참된 평화를 찾아서 새로이 회심하여야 하며, 평화의 건설자들은 “하느님이 아들이라 불릴 것이므로”(마태 5,9) 행복하다고 선언한 복음의 메시지가 새로운 빛을 발하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의회는 “진실하고 숭고한 평화의
에서는 현대세계의 경제-사회생활을 식별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은 “어떤 경제 만능주의 정신”에 물들어 있다고 보았으며, “경제생활의 발전이 합리적으로 또 인간답게 지도되고 조정되기만 하면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때로는 더 자주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또 어떤 곳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퇴보시키고 가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가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선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으로서 의식주, 신분 선택의 자유, 가정 형성의 권리, 교육과 노동에 대한 권리, 명예와 존경에 대한 권리, 정당한 보도를 들을 권리, 자기 양심의 바른 규범에 따라 행동할 권리, 사생활을 수호할 권리, 종교적 분야를 포함한 정당한 자
교회의 발언은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머리말에서 “공의회는 누구를 향해서 말하는가?”하고 스스로 자문(自問)한다.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발언이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밝힌다. 이는 교회가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제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는 어머니다운 배려로 세상을 품어야 교종 요한 23세는 1961년에 를 발표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앞두고 교회가 인간과 세상을 대하는 근본태도의 변화를 촉구했다. 한마디로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품어 안으라는 전갈이다. “교회는 어머니다운 배려로써 개개인과 민족의 삶을 이끌어왔으며, 그 드높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언제
사회주의자들이 그분의 친구이고 그분의 동지였다 도로시 데이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해서 줄곧 던진 질문은 정치적 비전과 복음적 비전을 통합시켜서 교회의 비전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처음 가톨릭교회에 입문할 때에도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 안에서 발견하려고 애썼다.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도로시 데이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잭 런던과 업턴 싱클레어의 계급주의 소설에 자극받아 ‘무수한 독자들에게 그들이 직면한 불의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그런 책을’ 쓰려고 꿈꾸었다. 하지만 늘그막에 그녀는 전혀 다른 작가로 변모해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아니 그보다
성령이 하신 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종 요한 23세가 1959년 1월 25일 공의회 소집공고를 하였을 때, 교종은 “누군가 나에게 넌지시 일러준 바도 없고 보면, 나의 결정에 가장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다”고 고백했다. 그 결정은 “불현듯 성령께서 감도하신” 덕택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것은 교종의 무류성에 대한 약속 때문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