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여기던 이성춘 신부님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실 때가 되었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았어. 들리는 소문으로는, 한국에 돌아오시려고 배를 타셨다가 배가 떠나기 전에 배에서 내리셨다 하기도 하고, 아프리카로 떠나실 거라고도 했고, 봉쇄수도원(외부와 접촉을 끊고 기도와 노동을 하는 수도공동체)에 들어가실 거라고도 했어. 당시에 프랑스 신부님들은
성당에서 살기 시작한 우리 식구내 졸업과 동시에 우리집 식구는 신부님이 사시는 사제관으로 이사를 했어. 드디어 나는 소년가장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지. 물론 월급도 없고 우리식구 먹고 자는 게 전부였지만 말야. 어쩌다 신부님 형편이 되면 용돈이 생기는 거였어. 나는 신부님과 성당일을 돕는 ‘성당복사’가 되었고, 여동생은 신부님의 식사
스무 살 때(1959) 그때는 사는 게 무척이나 고단한 시절이었지만, 나름의 건강한 놀이도 있었어. 내가 어느 책에 썼던 밤놀이도 그 중 하나인데, 슬기야! 네가 나대신 이 대목을 읽어주겠니?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 ‘1950년대, 내가 중고등학생시절 때입니다. 겨울철이 되면, 거의 매일같이 할머니 방에서 신바람나는 공연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소년 가장, 고1 때부터 담배 피우고..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봉화읍에 하나 밖에 없던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 그리고 3년 반 동안 살았던 고아원을 나와, 할머니와 여동생이 사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 초가집으로 왔어. 초가삼칸이 아니라 초가이칸이었지. 어쨌든 나는 그때부터 소년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어. 그때는 ‘소년가장’이란 말도
하루는 여동생이 고아원에 있던 나를 찾아왔어. 할머니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거야. 밀주 단속에 걸렸기 때문이었지. 그때 할머니 연세가 일흔일곱이셨어.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결국 원장아버지에게 사정을 말씀드렸지. 원장아버지는 곧바로 경찰서에 다녀오셔서, ‘조사가 끝나면 곧 나오실 테니 걱정마라’ 고 하시더군. 할머니는 경찰서 유치장에 계시
나는 중2 때인 1955년에, 교리문답 구두시험(찰고)에 합격하고, 안동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았어. 세례명은 루도비꼬(루수, 루이). 원장아버지와 여러 형ㆍ동생들과 함께였지. 시험에 떨어진 아이들이나 너무 어린 아이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어. 그때부터 안동본당 봉화공소(공소 :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가 설립되어, 주일마다 공소예절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형은 버스차장 하고 지난해 늦가을, 우리는 원장아버지 집 마당에 지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어. 새집이라 했지만, 강당은 미군이 준 새 목재로 지어 새집 같았으나, 숙소는 헌 자재를 얻어다 지어서 집이 허술했고, 또 구들을 잘못 놓아 무척 추웠어. 언젠가는 방이 너무 추워서, 자고 일어나니까 내 몸이 새우처럼 꼬부라진 적도 있었지. 하지만 피난살이(!)를 접고
우리집 가장이신 할머니는, 형과 나를 나무꾼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셨기 때문에, 이리저리 궁리를 하시다가 한 가지 좋은 방법을 찾아내셨어. 당시 봉화에는 작은 규모의 고아원이 있었고, 그 고아원 정태중원장님이 우리 아버지를 잘 아는 아버지 후배였지. 할머니는 그 고아원 원장님을 찾아가 사정했고, 원장님도 우리 형제를 맡기로 쾌히 승락하셨어. 그래
봉화에 온 후로는, 형과 같이 산에 나무하러 다니거나, 부역을 다니기도 했지. 그리고 할머니가 손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당시 정부에서 금하는 밀주(막걸리)를 조금 담그어 한 두 대폿집에 팔기도 했는데, 주로 여동생과 내가 술 배달을 했어. 남모르게 감쪽같이 배달해야만 했지. 들키는 날이면, 거액의 벌금을 내거나 옥살이를 해야 하니까. 당시에는 부역도 자주
...... .......가장 어리고 또 가장 귀여워하시던 손녀를 잃은 고조할머니의 상심은 굉장히 크셨겠어요? 그래서 그 아픈 기억을 등지고 새 출발을 다짐하신 것 같아. 할머니는 뼈저린 여러 아픔들을 겪었던 영주를 떠나시기로 하신 거야.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우리집 가장이신 할머니는 결단하셨어. 봉화로 이사가자는 것이었지. 또 송기나 풀을 뜯어먹고
전쟁은, 밀리고 밀고 밀리고 밀고 했어. 북진하던 유엔군이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개입-인해전술로 밀리다가 또 다시 밀다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니, 한국전쟁은 3년 1개월이나 계속되었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학살, 생이별...... 그 상처는, 동족전쟁이 터진지 58년, 이른바 휴전이 된지 55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쌕쌕이들이 더 자주 나타나고, 쿵 쿵 쿵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리면서 우리가족은 영주의 북쪽 외곽 마을인 보름골인가 하는 마을로 또 피난을 갔어. 이제 인민군들도 도망가기에 바빠서 우리를 더 이상 간섭하지 못했지. 9월 15일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9월 28일에 서울을 완전해 수복했으니까, 아마도 서울수복 직후에 보름골로 피난을 가신 거네요,
하루에도 몇 차례나 번개처럼 나타나 폭탄똥을 싸고는 번개처럼 사라지는 쌕쌕이, 쌕쌕이소리 경보사이렌소리가 나기도 전에 벌써 머리 위에 나타나, 까만 똥을 싸갈기고 사라지고나면, 한참 있다가 여기 저기서 그 폭탄똥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지. 인민군들은 방공호에 기어들고, 얼마 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제 집 방구석에 코를 박고, 쌕쌕이가 빨리 사라지기를 빌었어
허위허위 드디어 영주 집에 도착했어. 귀향이라고 했지만, 귀향은 무슨 귀향이겠어! 어디를 가도 불안하고 암담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래도 길거리보다는 우리집이 낫고, 냇가 돌밭보다는 우리방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귀향(!)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에 남겨두고 갔던 반 가마 정도의 쌀가마니를 찾는 일이었지. 하지만 쌀가마니는 보이지 않았어. 할
7월인지 8월인지, 심한 피로와 갈증을 풀기 위해, 신작로에서 논을 가로질러 바라보이는 외딴 집을 찾아들었어. 가까이 가 보니 그곳은, 인민군 대여섯이 그 맞은 켠 신작로를 감시하는 초소였는데, 그 집 앞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나뭇가지들을 열리설기 걸쳐 덮어두었더군. 작전상 중요한 초소였던가 봐. 할머니와 아이 손님들이어서 그런지, 물 한잔 마시며
우리식구가 끼인 피난 행렬은, 안동-의성-군위를 거쳐 군위와 다부 사이 신작로 옆에 작은 연못이 있던 어느 마을에 닿았어.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지. 이곳까지 오는데 몇 날 며칠이나 걸렸는지 알 수도 없고 또 관심도 없었어. 가져간 쌀이 떨어진지 벌써 여러 날이어서, 이곳까지 오다가 해가 지는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한 일도, 빈 집을 돌며 뭐든 양식이
동네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피난보따리를 싸서, 이고 지고 들고 떠나기 시작했어. 우리집 옆 제방에 올라가 보니, 벌써 안동쪽 신작로가 피난민으로 꽉 찬 채, 그 인파가 안동쪽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할머니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랑 피난보따리를 싸기 시작하셨어.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일흔하나, 할머니 갑년(회갑)에 내가 태어났으니까 나는 할머니와
어느 날 저녁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말씀하셨어. "어머님, 우리식구는 영주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제가 먼저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 곧바로 내려오겠어요." "이사를 가겠다는 거냐?" 할머니가 물으셨고, 형인지 동생인지 "그럼 우린 아버지랑 함께 사는 거지?"라고
1948년 초겨울 밤이었어. 우리집 문이란 문은 모두 열려있고, 등이란 등은 모두 켜져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동쪽 제방 위에는 강력한 탐조등이 우리집 전체, 특히 기와집 쪽을 비추고 있었고, 그 탐조등 옆에는 큰 기관총을 장치하고 손확성기로 소리소리 지르고 있고, 우리 가족들은 방구석에 머리를 박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 아홉 살인 나는 그 탐조등과
• 할아버지 : 나는 여덟 살이 되자 봉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배중이셨던 아버지는, 나를 위해 평생을 써도 끄덕없을 군인 헬멧재료로 만든 플라스틱(!) 책가방과 멋진 가죽 구두를 플라스틱(!) 책가방과 멋진 가죽 구두를 일찍부터 마련해 놓으셨어. 아마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책가방과, 여느 아이들은 고무신도 제대로 못 신던 시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