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들이 이파리를 흩뿌리면 막대그래프처럼 앙상한 나무에 휘감긴 바람이 하향곡선을 그리며 빙점 아래로 떨어진다. 헐벗은 겨울이 오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처럼 붕어빵들이 우리 곁으로 회귀한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말하지만,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철에 붕어빵만큼 생의 기척을 일으키는 것도 없는 것 같다.공부방 아이들 중에서 영주는 겨울을 가장 기다
수입 안약 3만 5천 원, 신경정신과 약 45만 원, 그리고 고가의 간질약이 약 봉투 안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무료 진료소로서는 감히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비싼 약이다. 그러나 이런 약 때문에 사흘이 멀다 하고 환자와 승강이를 벌이는 것이 진료소의 일과다. 대부분의 환자가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알코올 중독이라서 툭하면 약을 잃어버리고 다음날 다시 와서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슬로비디오 화면처럼 진료실에 들어섰다. 그동안 많은 남자를 봐 왔지만, 그처럼 머리 뒤에서 후광을 뿜어내는 피조물은 성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빼고는 그가 처음이었다. 단군 이래 최고의 미남이라는 장동건보다 더.하얀 피부, 훌쩍 큰 키, 금테 안경 뒤에서 반짝거리는 눈동자, 세련된 기품이 철철 넘치는 서울에서 온 명문대 의대 출
“언니~”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명원 씨다. 삼년만이다. 걱정 반 반가움 반에 당장 만나자고 했다.처음 그녀를 만난 곳은 노숙인 쉼터다. 쪽방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가톨릭 예비자 교리반에서 유일한 여성 노숙인이었다. 남성 노숙인 틈에서 끼인 홍일점인지라 특별히 관심이 가서 이것저것 잘 챙겨주었다. 거칠고 험한 세계에서 살아남느라 다져진 배짱과
고시생 쉼터의 문을 막 열고 들어서는데 현 군과 마주쳤다. 이 시간이면 학원 강의를 들을 시간인데 의외다. 진지하고 차분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안절부절못하다. 상담실에 마주 앉아 차를 권했다.“지혜가 헤어지자네요.” 채 말을 잇지 못한다. 올 것이 왔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현 군의 나이 서른한 살, 고시생이다. 젊음의 호르몬을 꽁꽁 묶어 스스로를
“그간 어데 댕겨온겨?” 골목을 막 들어서는데 샐리가 반색을 하며 반긴다. 어지간히 기다린 눈치다. 내 팔목을 잡아끌고 모퉁이로 가더니 봉투를 연다. 영호가 보낸 성탄카드와 가족사진이다. 샐리의 쪼글쪼글한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분가루가 오늘따라 화사하게 빛난다.매일 무료진료소로 출근하는 길에 나는 일부러 이 쪽방골목을 선택한다. 큰 길을 놔두고 굳이 좁고
빨강, 노랑, 파랑, 하양… 전부 쉰여섯 알. 내과, 정형외과, 신경정신과, 피부과 그녀의 몸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약제실 창문 밖에서 쏘아보는 그녀를 설탕 듬뿍 넣은 달싹한 커피로 일단 달래놓고 이제 그녀의 스타일대로 약을 조제한다. 안구의 실핏줄이 터지도록 눈을 부릅뜨고 신경의 씨줄과 날줄을 곤두세워야 한다. 긴장해서인지 진땀이 나고
‘투더더덩 투덩 투더더덩덩’ 휴일인데 창문에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새벽 5시15분.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불현듯 이틀 전 병원 옥상의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모종이 생각났다. 수확을 미룬 고구마도 걱정이다. 지난해 여름 상추 모종을 장맛비에 내놨다가 몽땅 망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심은 배추모종이 늦은 빗줄기에 무사할까…. 눈
“틀림없다. 그놈 맞데이!” 노숙인 쉼터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정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문 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해서 정씨와 변씨 두 배꼽친구는 45년 만에 노숙인과 봉사자로 재회했다.정씨와 변씨는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의 친구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처음부터 ‘쨉’도 안 되는 엄청난 거리가 놓여 있었다. 비록 한 교실에서 한
소식이 없던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동산으로 재미를 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의외로 하소연이 길다. 들어보니 ‘하우스 푸어’ 신세가 되었다. 집, 그것도 강남의 비싼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인데 집을 가져서 가난하다니!2006년 중반 33평 아파트가 6억 원을 넘어 7억 원을 향하던 시기에 더 오를 것이라는 대박꿈 속에 후배는 8억 원 넘는 빚을 내 분당 신
한가위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가위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으로 송이버섯이 꼽혔다고 한다. 송이버섯 하면 잊혀지지 않는 분이 있다. 신입약사 시절 내게 송이버섯을 남겨 주시고 세상을 떠난 환자이다.병동에서 연락이 왔다. 조제한 약에서 정체 모를 이물질이 섞여 있으니 확인해 달라고 한다. 산재병동에 입원한 진폐증 환자들은 워낙 예민하고 까다로워 직접 확인을 해
‘이 책을 슬쩍 가지고 나갈 수는 없을까?’ 올림픽 경기장만큼이나 넓은 대형서점 안의 북적이는 손님들 틈에서 나도 모르게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순간 뇌가 텅 비는 듯한 당혹감에 온몸이 후들거렸다.‘계산대를 통과하지 않고 이 물건들을 들고 나갈 방법이 없을까?’ 나처럼 혜정 씨 역시 슈퍼마켓에서 계산대를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우리가 다니던 병원의 부
'어제의 적은 오늘의 고객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보험금을 남긴다.' 황구 어머니 김 여사의 보험판매전략이다. 팔십을 바라보는 김 여사, 오늘도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데는 많다. 김 여사의 앙상한 어깨에는 지난 40여 년의 보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낡은 가죽가방이 무겁게 달려 있다.고향에서 보
정록이가 또 가출했다. 세 번째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가출을 했다. 아침을 먹는데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정록이가 시외버스정류장 매점에서 빵을 훔치다가 잡혔다고 한다. 급히 파출소로 갔다. "우라질 놈!" 욕이 절로 나왔다.정록이는 성당의 주일학교 중등부 1학년이다. 덩치가 크고 조숙해서인지 또래들과 겉돈다. 가뭄에 콩 나듯 주일
"(빵빵~) 왜 안 비키고 길 막고 그래요!" 운전사가 고함을 지른다. 리어카 위에 수북이 쌓인 박스와 빈병들이 위태위태하다. 신경질이 잔뜩 실린 경적 소리에 할머니의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나 주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리어카, 질질 끌리는 발걸음,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안쓰러워서 나도 모르게 할머니 뒤에서 리어카를 밀었다. "아이구,
노숙인 진료소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시간이면 형님, 아우 하며 현관에서 수다떨 봉 형님과 안 수사님인데, 봉 형님은 안 보이고 안 수사님의 도끼눈만 이글거린다. 노숙인 박 씨에게 빌려준 돈이 문제였다. 일주일 후에 꼭 갚겠다고 해 놓고 박 씨가 먹고 튄 것이다.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내보내지 않는 짠돌이 안 수사님이 봉 형님의 말만 철
"어서 오세요!" "아줌마! 여기!" 저녁 손님이 드는 시간, 24시간 문을 여는 감자탕집이다. 우람이 엄마를 찾으니 주인 아저씨가 주방 쪽을 가리킨다. 주방 안 개수대 앞에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우람이 엄마다. 물컵, 맥주컵, 가위, 국자, 집게 등이 산더미처럼 쌓인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 중이다. 바닥에는 까맣게 타버린 불판과 감자탕 냄비 수십
“나 수녀원 나왔어!”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전화 수화기를 든 채 한참동안 멍했다. 전에도 이런식으로 내 뒤통수를 치고 떠나더니 이번에는 앞통수다. 그녀의 이름은 배신자. 내가 붙인 죄목이다. ‘배신’에다 ‘괘씸’까지 더한 죄다.우리는 대학병원 약제팀에서 같이 일했다. 팀원중에서도 손발이 척척 맞는 동료였고 적극적이고 활발하고 명석한 그녀가
“씨팔, 이거 내 약 맞어? 씨팔!“ 김 씨는 말끝마다 ‘씨팔’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씨팔‘일까? 화가 나서 씨팔인지 억울해서 씨팔인지 그의 눈빛만 봐도 안다. 오늘은 입으로만 씨팔이지 눈빛은 기가 죽었다. 오른쪽 눈 두덩이의 시퍼런 자국을 보니 누구와 한판 붙었든지 아니면 무전취식으로 밥값을 치룬 게다. “파란 거 네 개, 노랗고 큰 거 세 개, 분홍색…….” “됐어, 씨팔!” 내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약 봉투를 확 낚아챈다. “먹고 콱 뒈지는 약 없어? 씨팔!” 절뚝거리며 문 쪽으로 휑하니 사라진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공포위기로 몰아넣었다. 엘리트이자 꿈의 기업에 다니는 사촌동생 재승이 그 희생양이 될 줄이야. 은행직원의 말은 달콤했다. 펀드매니저가 알아서 다 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똘똘한 그가 꾐에 빠져 비극의 길에 들어섰다. 유혹인즉 이러했다. 펀드 매니저가 알아서 좋은 주식을 사고 팔아주니 위험부담이 적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