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언젠가 자신의 영성과 꼭 닮은 영성을 갖고 있는 선배신학자를 만납니다. 혼자 고안해 낸 것 인줄만 알았던 바로 그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해 신의 얼굴과 신의 마음을 그려낸 어느 신학자의 글을 만나면 무척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머릿속을 들킨 것 마냥 당황스럽기도 하죠. 그런 예기치 않은 조우는 아마도 신학 하는 기쁨 중 하
부모님께서 다녀가셨어요.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이후로 부모님과 그리 살뜰하게 세끼 밥 같이 챙기며 피부 맞대고 지내본 적이 없습니다. 지독하게 속 썩여 드렸던 유별난 딸자식 키우시며 맘고생이 많으셨던 두 분. 귀국길 배웅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좋은 구경 시켜드리고 좋은 음식 대접하고, 무엇보다 살갑게 웃는 모습 많이
“어머니.” 세상에 이 단어만큼 깊고 뜨겁게 마음을 파고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어느 누군들 이 단어에 뭉클한 감정을 품지 않을 이 있겠습니까만, 십년 가까이 외국에 나와 사는 제게는 이 단어가 더더욱 특별합니다. 어머니, 이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그리움과 송구스러운 마음을 차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몇 년에 한번 씩, 그것도 다만 몇 주
제가 사는 곳 애틀랜타(Atlanta)는 미국 남부 조지아(Georgia)주의 주도입니다. 1996년 올림픽 이후 빠르게 성장하여 지금은 동남부 정치, 경제, 교통의 요지가 되었지만, 봄철과 여름철에는 아직도 오래 된 미국 남부 시골의 면모를 드러내는 곳이지요. 층층나무가 하얀 꽃망울을 터뜨릴 때 쯤 되면 도시 전체가 할머니 무르팍처럼 따뜻하고 나른해져 어
요즘은 종단과 교단을 막론하고 많은 종교 공동체들이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가끔은 종교와 관련 없는 행사에서도 이 단어를 발견하곤 합니다. 폭넓게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막상 영성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영성이 도대체 뭘까요?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영성이란 인간의 영혼이 지니는 ‘품성
파스카 성삼일의 대단원이자 교회력의 중심인 부활성야 예식은 성체성사로 절정을 이룹니다. 부활의 촛불이 이 땅에 드리워졌던 혼란과 외로움을 거두어 내고, 구약과 신약을 가로지르는 신과 인간의 드라마가 세 시간의 마라톤 미사를 통해 재현되면, 수난감실을 벗어난 성체가 마침내 우리 앞에 눈부신 모습을 드러내죠. 파스카의 신비가 새삼 벅차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3년 전, 논문 자료조사 지원금을 받아 벨기에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여행이었어요. 누군가 벨기에를 “충돌하며 소통을 꿈꾸는 나라”라고 이름 지었더군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중세후기와 근대초기 유럽 국가들 중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Low Countries(북해연안의 저지대 국가)”
미국이라는 이 거대한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게 곪아 있는 문제는 아마도 인종차별일 것입니다. 남부에서 나고 자란 백인 아주머니와 한집에 오래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이들의 생활 면면히 배어 있는 인종적 편견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공립학교 교사인 덕에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고, 본인이 인종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
대한민국 군형법 92조는 "계간 및 기타 추행을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동성간 성행위를 “계간(鷄姦)”이라는 치욕적인 용어로 비하하는 동시에 “추행”이라고 규정하여 동성애를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대표적인 반인권 조항이죠. 형법과 군형법 등 성폭력을 규율하고 있는 법률들이 강제적인 성추행을 처벌하고 있는데 반해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Oh, sometimes it causes me to tremble, tremble, tremble)거
교회 안과 밖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 마음 아프고 속상할 뿐입니다. 모두들 다른 입장을 갖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는 점점 힘들어집니다. 도대체 현실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명쾌한 답변을 찾아줄 신학자 어디 없을까요? 사실, 이 질문은 참으로 곤란한 질문입니다. 신학은 원래 모호성을 그 본질로 삼는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지난 번 폰 발타자 편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막걸리와 밤고구마가 웬말이냐. 기만이다. 너무 길고 장황하다. 체하겠다"더군요. 제가 좀 욕심이 과했나 봅니다. 반성하면서요. 이번 호부터는 조금 간결하게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러분께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학자는, 아마도 많은 분들께 이미 친숙한 분일 듯 해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에 연재를 하게 된 조민아입니다. 이 글은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에 2010년 12월부터 연재했던 글을 다시 다듬어서 소개하는 글입니다. 딱딱하고 지루해지기 쉬운 신학 담론들을 여러분들께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풀어보자!’ 로 원칙을 정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