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는 2017년 11월 19일 평신도 주일을 시작으로 2018년 평신도 주일(11월 11일)까지 “평신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오랫동안 교계 질서를 유지해 오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양떼로서 간주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 땅에 뿌려진 신앙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처음으로 신앙의 빛을 밝히고 초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분들이 바로 깨어있던 평신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친분 있는 신부님들 중에서
불상에 표현된 부처님은 보통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부드럽게 편 모양을 보여 줍니다. 이때 엄지와 검지가 만나 이루는 원은 법륜(부처의 가르침을 수레바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의미하고 펴진 손가락과 손바닥은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상에서도 예수님이 취하고 계신 오른손의 모양새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정확히 그 모양새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심 질문을 던졌다가 확인해 보는 것을 잊고 지내 왔을 뿐이지요. 이것에 대해 질문해 오신 분이 계셔
임종한 이에게 세례를 달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가족들의 청이 있다면 저는 칼로 무우 썰듯 그건 불가능하다는 말씀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임종한 당사자가 평소에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그의 가족이 원하고 있다면, 죽은 이가 아니라 최소한 산 이들을 위해서라도 비상세례를 줄 이유가 있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이 실제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데에는 임사 체험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기
공동체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봉헌하는 미사(세계평화를 위하거나 절대적 빈곤 퇴치, 혹은 공동체에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미사 같은)가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미사는 그 지향에 따라 크게 생미사와 위령미사(연미사)로 구분됩니다.생미사는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미사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영적, 육적 건강을 기원한다거나, 병환으로 고통 받는 이가 속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청합니다. 혹은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한 지향을 가지고 미사를 드리기도 합니다.반면, 위령미사는 우리
요즘은 성당에서 세례명(洗禮名)을 물을 때 어떻게 질문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에는 세례명을 물을 때 “본명(本名)이 뭐죠?”하고 물음을 받거나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주일학교 출석부에도 이름 칸이 있고, 그 옆에 본명이라는 칸이 있어서 세례명을 적어 놓았던 기억도 어렴풋이 납니다. 아무튼 그때는 그것이 당연히 그런 것이려니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저만의 기억이 아니며, 요즘도 성당에서는 종종 “본명”에 관한 질문을 받는 분들이 계신가 봅니다. 어쩌다가 나의 이름, 즉 본명이 세례명이 된 걸까요
죄에도 경중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문제를 낸다면, 응답의 대부분이 “있다”일 것입니다. 최근 알게 된 사실 즉,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무지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상적인 법은 범죄에 대해 합당한 형벌을 집행할 것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죄의 무게가 다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우리의 신앙 안에서 죄의 종류를 가름해 보면, 우선, “원죄"와 그 외의 죄인 “본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죄는 다시 “대죄"와 “소죄"로 나뉘게 됩니다.원죄는 아시다시피, 최초의 인간이 지은 죄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그
‘성당’, ‘본당’, ‘교회’는 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냥 구분 없이 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구분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낱말들 사이의 구분이 시원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큰 차이는 없다고 하지만 사용할 때 뭔가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그 단어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이 용어들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에 응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당과 본당을 가리키는 말을 영어로 찾아보면, 성당은 처치(church), 본당은 패리시(parish)가 될 것입
십자가의 길 기도를 무척 열심히 바치는 신자분이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흔히 사순기간에 집중하여 바치는 기도이며, 예수님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원래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지에서 예수님이 걸으셨던 고통의 길을 따라가면서 바쳤던 전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일이 그곳의 평화롭지 못한 분위기 때문에 점점 어려워지자, 서서히 오늘날 우리가 바치듯이 14처와 묵상자료 및 기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를 연중시기에도 바치는 것은 주님의 고통을 늘 기억하고자 하
안수(imposition of hands)는 사람이나 사물을 축복(benetiction)할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사람에게는 머리에 두 손을 정성껏 얹고 기도하며, 사물은 그 사물 위에 손을 얹습니다.안수는 준성사에 포함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준성사는 성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루어질 수도 있고, 성사와 별개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준성사의 예로는 축성, 축복, 봉헌, 구마 등이 있습니다. 준성사를 이루는 요소에는 언제나 기도가 있고, 안수, 십자성호, 성수 뿌리기 등이 동반되기도 합니다.(이에 대해서는 “축성과 축복은 같은 말인
이런 질문을 꼭 교회상식에서 거론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카푸친 프란치스코회가 언급된 김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따라 사는 대표적 남자 수도회들은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라 사는 대표적 여자 수도회는 클라라회입니다.제가 아는 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시는 수도회는 오늘날 크게 세 수도회가 있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Order of Friars Minor Conventual, OFMconv)와 "작은 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 줄여서 O
신학 과정에 있는 형제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경당에 감실이 있습니다. 이 감실의 감실 등이 수명을 다했나 봅니다. 전구를 갈아 끼워야 하는데 갑자기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공동체에 붉은색 전구가 있나? 붉은색이 없으면 어쩌지? 그러다 보니, 감실 등은 왜 붉은색인 거요? 하는 질문까지 나왔던 것입니다.사실 이 질문을 받고는 제가 그 형제들에게 답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상식적 수준의 것이었고, 그들도 이미 속으로는 그 답을 찾아냈을 것이라 어림합니다. 독자분들께서도 답을 내리실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본당에 있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며 신앙을 키워 나가는 젊은이가 기복신앙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기복신앙을 과연 신앙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바람직하다고도 할 수 없고 쉽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신앙을 키워왔던가를 돌이켜 보면 말입니다. 물론,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삶의 경험과 고민에 따른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나 현세의 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을 시작하신 분들의 경험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그래서, 기복신앙을 ‘신앙이 아니다’라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고자 하는 분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 중에 한 예를 들자면, 아마도 구약성경에서 보게 되는 잔인한 “폭력”일 것입니다. 독자분들도 돌이켜 보시면, 교리를 익히는 과정에서 느꼈던 난점들을 나열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입문 후 시간이 제법 흘렀어도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꾸준히 묻고 답을 내려 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질문은 신앙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학생이 제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받은 지 오래된 분들 중에서도 여전히 당혹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
비신자가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는 데 이렇다 할 어려움은 없습니다. 사회법상 이혼을 했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 대단한 흠결도 아니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교회는 신자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관면 혼배를 하도록 교회법 차원에서 조건을 걸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결혼이기를 기대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비신자 배우자가 신자인 배우자의 신앙을 존중하거나 적어도 반대하지 않도록 동의를 받은 후 혼인성사를 거행하는 것을 관면혼배라고 합니다.따라서 엄연히 성사로서 그 품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 의미는 혼인성사로 묶인 관계인 부부는
마음씨 착한 친구 신부가 물어 왔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다 보면 가끔씩 이런 고백도 듣게 된다고 합니다. 전에 받은 보속을 하지 않았다, 보속을 하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냐 등의 고백 및 상담요청이 그 내용입니다. 그 질문을 제게 다시 물어 온 것입니다. 어림해 보면 그 사제의 품성상, 고백하러 온 분의 사정을 좀 더 찬찬히 듣고 그분의 마음을 달래 보려 했을 것 같습니다. 전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을 하지 않았거나 보속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은 "보속은 안 해도 되지 않나요?"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고해를 하는 당사자가
전대사라 함은 죄에 대한 잠벌들을 없애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고해성사를 통해 죄는 용서받았지만 저지른 죄에 딸린 벌은 남아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해소해 준다는 것입니다. 죄에 딸린 벌은 보속행위를 통해 충분히 해소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속이 충분했다면 다행이지만, 부족했다면 이 세상을 떠나서도 보속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대사는 이렇게 죽어서 보속해야 할 기간을 없애 주는, 혹은 단축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겠습니다.(“전대사는 면죄부와 같은 건가
미사 중에 축성되어 성변화된 빵과 포도주, 즉 성체와 성혈을 들어올려 신자들이 쳐다보고 경배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를 거양성체라고 합니다. 용어의 의미를 엄밀히 따진다면, 성체를 들어 올리는 행위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양성혈이란 말을 따로 사용하지 않고,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리는 것 모두를 보통 거양성체라고 합니다.(가톨릭대사전 참조)거양성체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던 마지막 만찬을 재연할 때 합니다. 사제는 마지막 만찬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미사 때마다 보여 줍니
수도회에 관한 속풀이를 보시다가 궁금증이 생겼는지,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떤 수도회에 입회하여 살다가 자신에게 좀 더 잘 어울리는 생활양식의 수도회를 알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수도회를 옮길 수 있을까요?그냥 팔자려니 하고 현재의 수도회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가 답일 듯도 하지만, 소속 수도회를 옮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를 가듯이 가볍게 처리될 문제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소속 수도회와 옮겨 갈 수도회의 장상들 양쪽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즉, 현재 수도회에서 퇴회
한 지인이 "영신수련"이란 책에 '중용'(中庸, indifference)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그 뜻을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이란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쓴 일종의 ‘피정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될 것입니다. 이 책에 관해서는 “영신수련이 뭔가요?”를 함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영신수련"에서 등장하는 '중용'이란 개념은 사서오경의 한 경전인 중용에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는 시기가 특별히 정해져 있는지 물어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통 세례를 받을 사람이 소속 본당에서 정해 놓은 연간 일정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일반적으로 연간 두 차례 세례성사가 거행됩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에 맞춰서 말이지요.예비신자의 소속 본당은 통상 그가 실제 거주하는 주소지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가 본당의 일정에 따른다는 것은, 예비신자 모집 시기부터 시작하여 교리 수업을 받는 기간(통상 6개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