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는 빵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두 가지 형태의 표현을 제시한다. 오늘의 복음은 그 첫 번째 표현인데, 다른 세 복음에 나타나는 같은 사건에 대한 표현들과 더 일치한다.경청하고 먹기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일상의 양식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필요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릴 때 처음으로 말을 시작하며 배운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잘 알
이번 주일 말씀은 마태오 복음서의 비유들로 이루어진 장이 마무리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 결론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하느님나라의 절대성두 개의 짧은 비유들이 하느님나라의 고유한 가치를 강조한다.(마태 13,44-46) 보물과 진주는 하느님나라가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절대적인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의 요구는
이미 말한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의 13장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몇 가지 비유로 구성된다. 비유들은 모두 역사에 나타나는 하느님나라가 과정 중에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나라는 갑자기 도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간 속에서 하느님나라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분별마태오 복음에 자주 나오는 주제 중 하나는 심판(마태 7,21-13; 2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은 하느님나라다. 비유들은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중요성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별한 길이다.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일 때의 어려움13장은 마태오 복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장이다. 12장은 예수님의 사명이 거부되는 것을 다룬다. 13장에서 마태오는 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나라에 관하여 논쟁하고 무시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왜
마태오 복음서는 심오한 교회 체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그의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계시를 받은 이들오늘,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구절을 읽게 된다. 배경은 하나의 기도요, 감사이며 논리적 질문이기도 하다: 이유가 무엇인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사람들”(마태 11,25)은 율법학자들, 대사제들과
이번 주일에 우리가 읽는 복음서는 사명으로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주는 예수님 가르침의 최종결론이다. 이 결론은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세례 때문에 그들 모두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사랑으로 예수를 따르기“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놀라운 말로써 예수님은 제자됨이란 그분
이 연중시기의 주일들에, 우리는 마태오 복음을 읽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주요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용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두려워하지 않기마태오 복음서 10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바쳐진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어 파견하는데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지침들도 주고 있다. 그것은 하
예수님의 몸과 피의 축일은 그분의 전적인 순명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역시 그같은 순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그리스도 안에 머물기요한 복음의 긴 6장은 빵의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의 말씀은 다른 이전 구절들에서 그렇게 분명치 않았던 성사적 관점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이처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는 의도가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에
중요한 축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예수 승천 축일 뒤 성령 강림이 왔고 이제는 삼위일체 축일을 맞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삼위일체 축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일과 같다.아들을 보내어 구원하다요한 복음서의 3장은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을 표현한다. 3장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회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
주님의 육체적 부재는 제자들에게 분명한 책임들을 부과한다. 주님의 부재 그 순간부터 그들은 그분의 일을 계속할 것이다.온 세계로 나아가다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다섯 구절은 전체 복음서에서 제시된 메시지를 포괄적이면서도 침착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방금 들은 것처럼 장면은 갈릴래아에서 벌어진다.(마태 28,10)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대부분의 설교를 했던 자리였으
생명을 내놓는 것은 직무이며 섬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늘 이해해 왔던 사실이다.아버지께로 가는 길요한 복음 11장의 마지막 구절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이 제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예수님은 시련의 때에 그들이 믿음을 더 깊게 하기를 요청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불확실함 가운데에서, 오늘의 전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알아보도록 초대하고 있다.풍요로운 생명예수님을 착한 목자라고 부름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기억에 영향을 미쳤던 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이 이미지도 농촌의 체험과 연관된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양떼를 사랑하고 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므로, 이 부활은 교회의 가르침과 증언의 핵심이 된다.성서를 다시 읽기루카 복음서의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매우 심오한 영향을 미쳐 왔다. 예수님은 방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걱정스럽게 이야기하며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제자들에게 신중한 태도로 합류한다.(루카 24,13-15) 그들은 슬프고,(다시 말하
성주간의 중심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념이다. 이번 주일의 말씀은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울려 퍼지게 한다.평화와 사명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행했던 많은 징표들 가운데 몇몇 징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 주려고 한다. 저자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
모든 인간의 고통 앞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이 우리가 외치는 기쁨의 소리를 목구멍에서 죄이는 것 같은 상황 앞에서 어떻게 부활의 기쁨을 기념할 수 있을 것인가?여인들, 처음에 도착한 사람들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모여서 밤새 잠들지 않고 깨어 있곤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했고 새벽녘에는 죽음을 정복한
우리는 성주간으로 들어가고 있다. 파스카 신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과월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신앙의 핵심예수님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은 복음서들의 가장 오래된 부분을 구성한다. 이 부분은 제자들이 제일 처음에 기록했던 부분이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주님에 대한 증언의 중심이다. 그런 다음에 차츰 유년 시절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이 더
죽음은 사막의 여정에도 있었고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도 많은 방식으로 현존하고 있다. 주님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예수님의 친구들이 베타니아 가족들은 예수님의 추종자들로서 제자들이며 친구들(더 장황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인 친구들)이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건강 상태에 관해 소식을 듣지만 분명하게 와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아니다. 심부름하는 사람은
우리는 성주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성주간은 죽음과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간이다.예수님은 해방하고 있다요한 복음의 9장은 요한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잘 구성된 부분들 중 하나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 그래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구걸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람의 불행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를 묻는
예수님의 사명은 유대 민족의 테두리 그리고 당대의 생각들과 편견들을 넘어 진행된다.생명의 물여기에서 우리는 요한의 아름다운 구절들을 만나게 된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측면을 보여 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종교와 관습들이 이교도들의 요소와 섞여 있다 하여 선한 유대인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가장 뜨거운 한낮에(낮 12시쯤) 예수
약속된 땅에 가기 전에 40년이 걸렸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과제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머물렀다. 유대 민족과 예수님의 이런 체험들이 사순절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막간극은 없다예수님은 결정적 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분의 죽음은 사명을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부활의 빛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