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일요일은 마리아의 존재로 가득하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자기를 비천한 존재로 여기며 하느님이 다만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으로 나타난다.기뻐하라!갈릴래아에서 한 처녀가 “기뻐하라!”(루카 1,28)고 말하는 사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기쁨은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의 전형적 모습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 이것이 “은총이 가득한 이여,”라는 표현의 의미다. 주님께서 그의 편에 계시고, 모든 일은 하느님의 자유롭고도 무상으로 주는 사랑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믿음은 대화가 시작된다는 선물이다. 주님은 마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때이므로 이 시기의 첫 주간 일요일의 성서들이 상기시키는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는 때다. 우리는 이러한 기대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기뻐하다전례에서 보면, 모든 깨어 있는 자세는 회개하는 측면을 동반한다. 즉 지금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탈하고 앞으로 올 것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돌아섬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성탄의 팽팽한 요구에도 오늘의 성서는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5)라는 오늘의 입당
기쁜 소식은 어떤 사람을 보내어 길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회심마르코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타났다.”(마르 1,4) 그는 칙사요 사자다. 요한이 선언하는 것은 예수님이 선포하려는 것을 준비해 준다. 요한은 사막에서 생명의 징표로 세례를 주며, 회개하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반드시 변화해야 할 것을 변화시키고, 굽어진 것을 곧게 하며 정의를 추구하고 매일 이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 가운데에 오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열렬히 준비하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사랑과 현존을 드러내는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일을 시작하자.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 시대의 징표에, 역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한다.예측할 수 없는 만남마르코 사가는 그의 복음서 시작에서 우리에게 경고한다: “때가 찼다.”(마르 1,15) 그는 하느님의 때, 알맞은 때, 충만한 때 -어떤 특정한 날짜를 정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마르코는 kairos라는 단어를 쓰면서 주님이 우리와 만나기 위하여 오시기로 선택한 때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고
연중시기의 끝에, 교회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의미를 상기시킨다.보잘것없음의 관점으로부터예수님의 설교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말하는 마태오 복음 5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제 제자들의 행동에서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상기시킴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사람의 아들,(마태 25,31) 왕(25,34)은 국가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올 것이다. 그분의 왕국은 권력의 왕국이 아니라 섬김의 왕국이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0,28)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하느님나라,
자유방임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가 우세하는 요즈음, 돈의 저축과 투자, 유동자본과 비밀구좌에 대하여 말할 때에 탈렌트(탈렌트는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의 주제를 이용하고 싶은 유혹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탈렌트의 비유는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하고 있다.두 가지 태도들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 태도들에 대하여 말해 준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과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을 그들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는 사람들의 태도들이다. 뿐만 아니라, 비유의 초점은 두 번째 태도의 비판에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장들에 나오는 비유들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날카롭게 해 준다.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우리의 삶을 심판한다.주님. 주님비유들은 예수님 시대에 거행된 결혼 예식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정해진 시간에 신랑이 도착하고, 모든 손님들이 함께 들어가면 예식이 시작된다. 항상 교회적인 체험들로 충만한 마태오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로 표현한다. 이 열 명 가운데에는 어리석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섞여 있다.(마태 25,1-4) 마태오는 여러 계
“너희들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너희들의 하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예수님의 훈계는 사제들에게 내려진 경고(제1독서)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에게 내려진 경고(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어떻게 공동체를 섬겼는가를 알아듣는 데에도 실마리를 주고 있다.(제2독서)우리들의 아버지 :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오의 구절은 바리사이들과 노골적 논쟁(대립)을 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그들의 모범으로 삼지 말도록 미리 경고한다. “왜냐
마태오 복음 22장의 메시지의 정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서로 갈라질 수 없다는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한 가지 사랑 혹은 두 가지 사랑?예수님은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에게(마태 22,37-40)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 두 가지 근본적 차원들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 두 계명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왜곡되게 해석함으로써 야기되는 교회 내의 긴장, 갈등들을 경험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이웃과의 관계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진짜로 중
이번에 마태오는 매우 잘 알려져 있고, 자주 설명되는 구절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러나 그 구절의 해석은 번번이 윤곽만 드러내고, 적절하지 못할 때가 많다.돈에 대한 집착예수님과 바리사이들 간의 대립은 점점 더 높아진다. 마태오 복음서의 다음 장(23장)은 이 논쟁의 절정을 보여 줄 것이다. 오늘의 구절은 그 절정의 순간에 대한 준비 노릇을 한다.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인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고질적인 적들, 헤로데의 추종자들, 로마인들의 협력자들, 그러므로 백성의 반역자들인 사람들과 협정을 맺는다.(마태 22,16) 이제 그들은
성경에서 잔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을 표현하는 데에 자주 쓰이는 표상이다. 이 잔치에서 하느님은 그분 자신을 자유롭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신다.하느님은 무상으로 가난한 이들을 선호하신다잔치 이야기에서 마태오는 두 개의 비유들을 나란히 놓는 것 같다. 그것은 손님들의 비유와 결혼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유다. 의심할 바 없이, 두 개의 비유는 하느님나라에 초대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랫동안, 비유 속에 등장하는 자격 없는 손님들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을 계속 읽어 왔고, 이제 마지막 비유들에 이르렀다.하느님 나라의 열매들마태오 복음서의 이 비유는 살인자 소작인들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비유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포도밭에 관해 말하고 있다. 포도밭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즉 소작인들은 그들이 일한 소출을 걷어오라고 주인이 보낸 사자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가한다.(마태 21,35)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소출, 열매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비유의 의미에 관한 핵심 질문이다.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인용되는 이사야서 구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길을 보여 주신다.의로움의 길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다. 그분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적의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오늘의 비유는 단순하고도 도전적이다. 그분 자신이 비교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청취자들의 의견을 묻는다. 결정할 사람들은 그들이다.(마태 21,28)다만 두 아들들의 행동이 묘사된 순서가, 큰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고 둘째 아들은 교회라는 해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자.(마태 21,28-30) 문제는 시기 순이
오늘의 말씀은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있는 비유에 관해서인데,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고결한 비유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오후 5시말씀은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인, 아버지 하느님의 자유롭고도 무상으로 베푸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하루가 끝나갈 무렵인 오후 5시에 일하러 온(마태 20,11-12) 일꾼들에게 하루 임금을 주기로 결정하자,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의 반대를 받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똑같은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그들의 비난을 일축한다; “당신은 나와 보통 하루 임금인 한 데나리온으로 합
성경에 표현되는 계시의 핵심은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이다. 이 주제는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규범이 되어야 한다.용서는 항상 무상이다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련의 가르침들을 담고 있다. 용서는 이러한 가르침들 중의 하나다. 베드로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 한다.(마태 18,21)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훨씬 더 넓은 지평 속에서 다룬다. 즉 우리는 항상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18,22) 신비스러운 표현의 의미
복음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신앙체험을 전해 주는데, 복음서의 저자들은 바로 그들이 속했던 공동체의 이름을 복음서의 제목으로 쓰고 있다.교회 구성원들을 다시 깨우치기마태오 복음서는 특별하고 명료하며 요구하는 방식으로 형제애에 근거하는 깨우침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공동체가 성공, 어려움, 규준, 갈등, 희망을 체험하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나, 그분을 따르라는 초대는 영원하다.예수님을 따르기지난 주일의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보여 주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이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마태16,16)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백성의 지도자들에게서 받을 어려움들을 밝히기 시작한다. 말씀에
주님은 그분의 사명과 따르는 사람들의 사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섬김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구세주를 알아보고 인정하기마태오 복음서의 이 구절은 베드로가 대변하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고백이 이방인들의 땅인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오는 은근하게 이
마태오 복음은 곳곳에서 이 복음서가 유대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쓰여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교 세계와의 관계가 중대하고 의미심장한 주제로 자리 잡는다.모든 국가들에게오늘의 말씀은 하느님나라 선포가 보편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가 역사 속에서 잘 해결되어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자주 궁금해 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만나기 위하여 오고 계시는 것이다. 이번 주일의 독서는 산, 폭풍, 미풍을 하느님께서 나타날 만한 상황으로 암시하고 있다. 복음은 우리가 “신앙이 부족한”때조차도 주님께서 먼저 그분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의 요청에 응답한다고 말한다.용기를 내어라, 나다마태오 복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