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역사적인 사명은 끝났다. 이제는 제자들이 그분의 부활을 증언할 차례다.제자들이 스스로 결정하기마르코 복음서의 결론을 누가 썼는지 그 정확한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 해도 고대 복음서와 전통은 그 결론이 마르코 복음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인정한다. 마태오 복음서의 결론과 비슷한 것도 사실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결론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다루고 있다. 마르코는 사명과 주님의 승천을 직접 연결하고 있는데,(마르 16,19-20) 마태오 복음서는 전혀 승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부활시기 내내, 교회의 전례는 우리에게 부활한 예수님의 출현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승리, 즉 사랑의 의미를 기념하는 복음 구절들을 상기시켜 준다.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요한 복음 15장은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살가움이 도드라진다. 그분의 메시지는 이렇다: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 사랑은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똑같다.(요한 15,10.12) 바로 이 사실이 우리 기쁨의 원천이어야 한다.(15,11) 예수님은 한 단어, 즉 우정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
부활시기는 우리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은 곧 생명을 주는 일이라고 알려 준다.연대와 결실성서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백성을 일컫는 이미지다. 포도밭의 이미지는 그들의 일상경험과 부합된다; 그래서 포도밭과 포도나무는 예수의 동포들을 표현하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포도밭은 하느님의 참다운 백성에 관한 것이다.(요한 15,1) 예수와의 연대는 열매를 맺는 조건이며,(15,2) 이 결속은 하느님의 백성을 정의해 준다. 포도나무 없이, 가지들은 말라 죽는다.(15,4.6) 생명은 몸의 각 지체가 기능을 다할 때에
오늘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생각해 볼 때에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는 데 사용되었던 가장 초기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는 착한 목자였다.상호적인 앎보통 때처럼, 예수님은 일상생활에 관한 비유를 근거로 한다. 그분의 청중은 농촌생활의 비유에 익숙하고 경험에 의하여 목자와 양들 사이의 매우 가까운 결속을 알고 있다. 목자는 그의 양을 알고 있어 심지어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성경에 의하면,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목자는 그분의 양을 사랑하고 양들도 그를 사랑한다. 요한 복음
부활한 주님의 출현은 제자들이 가진 믿음을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새로운 책임에 눈뜨도록 해 준다.빵을 나누며두 제자들이 “빵을 떼는”(루카 24,25) 예수님을 방금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준다.(24,36)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느낀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길을 그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평화를 선언했고 이제 다시 그 메시지를 확인해 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손과 발을 보여 주며 말한다: “바로 나다.”(24,39) 그분은 영이나 유령이 아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부활시기는 기쁨의 때이며 파견의 때이기도 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기다.믿음과 불신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은 뒤 두려움의 순간을 겪는다.(요한 20,19) 그런 상황에서 부활한 주님이 나타나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을 준다.(20,21) 예수님은 두려움이 닫았던 문들을 연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가져온다. 그 평화는 그러나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평화는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데 있어야 할 전제조건이다. 제자들의 사명은 아버지 하느님이 예수님에게 주었던 사명과 같
모든 인간의 고통 앞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이 우리가 외치는 기쁨의 소리를 목구멍에서 죄이는 것 같은 상황 앞에서 어떻게 부활의 기쁨을 기념할 수 있을 것인가?여인들, 처음에 도착한 사람들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모여서 밤새 잠들지 않고 깨어 있곤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했고 새벽녘에는 죽음을 정복한 그분의 승리를 기념했다. 부활성야가 그들에게 전부였다. 후에 부활성야 예식이 갈라지고 다른 요소들이 덧붙여지면서 점차 현재 우리가 지내는 성주간이 되었다. 과월-죽음으로부터 생명으
우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중심적인 신비를 기념하는 축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구세주인 예수님주님은 죽음과 대면해야 하는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준비한다.(마르 14,1-6) 그분의 적들은 수년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의 단순함과 정직함은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분의 사랑의 선포와 실천, 특히 가장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분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의 증언과 논쟁이 지니고 있는 취약점 때문에 무력을 사용하게 된다.두려움은 나쁜 충고자다. 이것을
“때”는 요한 복음서에서 반복하여 언급되는 성서적 용어다. 그것은 새로운 계약의 때를 말한다.(예레 31,31-34)예수님을 보기 위하여“어떤 그리스인들”은 “축제에 예배하러 갔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 주님은 이 요청에 대하여 “때”에 관한 길고도 깊은 묵상으로 응답한다. 요한의 복음서는 모든 것이 마지막 결과를 향해 있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쓰였다. 그 마지막 결과란,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예수님의 힘과 그분을 거부하는 불의한 힘과의 대면이다. 이 교차는 십자가에서 일어나고 마침내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승리, 부활로
이번 주일의 말씀은 신앙과 일, 은총과 책임은 분리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진실한 것을 행하기하느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그분의 아들을 우리들 사이에 보냄으로써 표현되었다. 아들의 현존은 “세상을 위한”(요한 3,16) 하느님의 사랑을 측정하는 잣대다.예수님의 모든 움직임,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우정을 보여 준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이 사랑을 지금 환영받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 의지는 모든 인간 존재에 미친다.(3,17) 그러나 하느님의 이 계
이번 일요일의 말씀은 매우 풍요롭다. 그 중에서도 강력한 한 주제가 돋보인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두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은 진정한 예배를 요구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반대되는 행위다.우상숭배와 억압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사명이 갈릴래아의 카나 혼인잔치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요한 2,1-12)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 민족의 권위와 처음으로 대립하는 장면을 본다. 이 일은 예루살렘,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전(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공생활의 거의 끝에 두고
밤샘은 항상 극기가 포함되는 법이다. 사순시기는 절제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준비하고 기대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의 말씀은 이러한 구도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이곳에 머뭅시다마르코 복음의 오늘 말씀에 앞서 있는 장면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어 안달하면서도 실천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느린 모습이다. 예수님은 제자됨에 필요한 조건들을 지적하는 기회를 마련한다.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여긴 아이를 치유하는 예수님을 보았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마르 5,37-43) 예수
오늘은 사순 제1주일이다. 우리 신앙의 중심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때다. 지금은 회개의 때이며 희망의 때다.광야: 시험과 만남의 자리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 1장 12-13절에서 마르코 사가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지낸 사십 일을 매우 간결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은 이 주제에 관해 대조적으로 길게 표현하고 있다. 마르코는 늘 그런 것처럼, 말을 아끼고 있다. 성령은 예수님이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있다. 광야로 예수님을 데려가 사명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생명의 징표이며, 신체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것을 아우르는 생명 전체다.주님의 연민예수님은 갈릴래아인들이 모여 성서 읽기와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회당에서 계속 메시지를 선포한다. 회당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종교적 기관들의 상징이다.(성전은 유대의 예루살렘에 있다). 나병 환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존재다. 그의 질병은 테러를 일으킨다.(오늘날 우리 시대의 나병인 에이즈에 관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뿐만 아니라 나환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된다. 신체적 고통 이외에도 나환자들은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레위기의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의 한 도시인 카파르나움에서 사명을 시작한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으로 갔다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말한다.(마르 1,21) “새로운 가르침”이라고(1,27) 불리는 그분의 메시지는 어떤 이들에게는 받아들여지나 의심할 바 없이 다른 이들로부터는 거부된다.제자들은 섬기는 사람들이다같은 날, 회당을 떠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 친구의 집으로 간다.(1,29) 그곳에서 예수님은 마르코가 언급한 첫 번째 치유를 행한다. 그분은 베드로의 장모를 생명의 하느님나라 징표로서 치유하는데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래야 활동 중심지다. 제자들을 동반하면서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의 오심을 선포한다.새로운 가르침예수님은 그분의 가르침의 시간과 장소를 안식일에 회당으로 선택하는 도전을 감행하는데,(마르 1,21) 이런 일은 복음에 보면 자주 일어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포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사이에, 사랑의 초대와 종교적 형식주의 사이에 차이를 본다.(1,22) 예수님의 행위는 종속, 거짓 이념, 거짓 신들, 그리고 기만적 행위들의 굴레를 풀어 주는
예수님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 또한 그곳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의 임명을 받는다. 마르코 복음은 매우 빨리 움직인다. 몇 구절 뒤에, 마르코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그분이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 준다.갈릴래아로부터유대 백성들에게, 다른 유대 지방인 갈릴래아는 멸시되고 의심스러운 지역이다. 이웃에 이교도들이 있는 갈릴래아는 관습, 종교에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또한 말하는 방식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선한 유대인들은 갈릴래아에서 아무런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하느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성소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경험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위한 길을 만들고, 제자들에게 그가 준비한 길의 주인공을 따르라고 초대한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그룹에서 나온다.(요한 1,35-3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1,36)으로 알아본다. 탈출기의 구조가 요한 복음의 이 부분에 뚜렷이 보이는데, 죽음을 통한 해방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어린양의 이미지는 이 주제를 표현하지만, 또한 요한은 묵시록에서 보이듯이 승리하
공현이란 드러남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공현은 성탄을 우리끼리만 하는 기념제로 국한시키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게 해 주고 역사의 갈림길에 있도록 해 준다. 역사의 길들을 가는 남녀들에게 공현은 부르심이요, 도전이다. 공현은 장애물들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밝혀 준다.베들레헴, 도시들 중에 가장 작은 도시마태오의 서술은 매우 다채롭다. 예수님이 태어난 뒤 현자들이 찾아왔다. 복음서는 현자들이 몇 명이었다고 밝히지 않으며, 왕들이나 다른 인종(색별)인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보의 부
아는 바와 같이, 루카는 예수님의 유년기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혹함과 약속들, 걱정과 기쁨들은 천사의 선언과 주님의 탄생이 가져온 모습들이다.이제, 주여!루카는 예수님의 가족이 백성에, 유대 민족의 종교와 희망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늘의 성서는 예수님의 성전 봉헌으로 알려진 이야기를 내놓는다. 루카는 “정결례”(루카 2,23)에 대해 말하는데, 그러나 사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레위 12,8) 여성인 마리아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어머니는 레위기에 따라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다. 만일 “양 한 마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