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불길 속에 녹아내리는 세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장장이는 오늘도 달궈진 쇠를 묵직한 망치로 내리치는 고단한 작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산다. 자신의 손을 거처 바다로 나간 수많은 닻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한다. 화수부두가 고철부두가 되면 인고의 세월을 뒤로 한 채 마음속에 묻어 둔 그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오겠지.
항구 도시인 인천에는 여러 부두가 있다. 한 때 만선의 꿈을 안고 고기잡이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을 부두. 현재 조업을 하고 있는 부두는 그리 많지 않다. 몇 개 남지 않는 부두 중 유일하게 생활터전이 함께 있는 곳이 바로 화수부두다. 인천시 동구 화수동 7번지. 예전에 흥청망청 호황을 누리던 이곳 부두에 어선들은 거의 떠나가 버리고 현재 100여 가구의 주
‘사람, 생명, 평화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온 몸을 땅에 던져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오체투지 순례단입니다. 이 순례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이름 없는 민심과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이 순례를 통해 ‘자연이 자연의 길을 가고, 사
그녀는 네비게이션을 생산하는 중견 중소기업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조합 분회장으로 일을 했어요. ‘일하고 싶다’는 너무도 소박한 그녀의 소망이 기륭전자 사측의 해고 통지로 산산조각이 났어요. 조합원들은 대부분이 여성이고 직접 고용과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1121일째 농성, 101일째 단식 중에 있어요. 주당 80여 시간을 일하고도
/김용길 2008-09-29
‘48시간 국민행동’이 시작된 토요일(6월 21일). 한국 여자와 남자 수도회 장상연합회 주최로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시국미사가 진행되었는데 미사와 토론회를 마친 수도자들이-대부분이 여자 수도자들- 시청광장으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시청광장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거리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ls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여름 평소처럼 침묵과 기도 시간을 갖고자 베르나 산에 은거하였다. 성인은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사랑과 고통의 신비에 자신의 온 존재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주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천사의 형상으로 발현하시어 당신 수난의 오상을 성인에게 선사하였다. 마음과 삶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을을 끼고 있는 곳이 바로 포지오 부스토네이다. 마을 골목을 지나다보면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리에티 (Rieti)를 중심으로 라 포레스타, 포지오 부스토네, 그레치오, 폰테 콜롬보가 위치해 있는데, 포지오 부스토네는 라 포레스타를 먼저 방문하고 가는 것이 편하다. 포지오 부스토
폰테 콜롬보는 해발 550미터에 위치하여 빽빽한 초목들로 둘러싸여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1217년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였다. 원래 이곳은 파르파의 베네딕도 수도회 소유였으나 적막한 가운데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방문한 성 프란치스코에게 이곳을 기증하였다. 그 당시 이곳에는 은둔지 (수도원), 성 프란치스코 경당 (Cappellina di San Fran
그레치오 성지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게는 베들레헴(Betlemme)과 같은 곳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헴을 순례하고 싶었지만 너무 먼 여정이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1223년 겨울, 성인은 그레치오를 아기 예수의 탄생이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는 사건임을 체험하고자 성탄대축일 전야
라 포레스타의 성 마리아 성지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1225년 눈 수술을 받기 위해 우골리노 추기경이 있는 리어티(Rieti)로 향하기 전에 성 파비아노 성당 주임신부의 초대로 잠시 머물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지입구에는 모자이크로 그 상황을 서술한 그림이 있고, 이어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현재 이곳은 약물중독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운영하고
가난한 이들의 성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건축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성을 위해 아시시를 방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 (Gregorio IX)가 첫 삽을 뜸으로써 시작되었다. 대성당은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되어 있다. 지하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이 있고, 지상 2층에는 위 성당과 아래 성당 그리고 수도원 건물이 위치해있다. 13-14세기의 유명한 화
식별을 위해 적막한 동굴로 카르체리(Carceri) 수도원은 성 프란치스코 동굴 주위에 생겨났다. ‘카르체리’란 적막한 장소를 의미하는데, 이 명칭은 그 당시 동굴에 으스스한 독방이 있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1205-1206년 사이에 동굴에 머물기 위해 이 산을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이곳을 방문할 때 보물을 찾았다고 말하면서
신고딕 양식의 리보토르토 성당은 1586년 교황 시스토 5세의 요청으로 세워졌다. '리보토르토' 라는 명칭은 성지 근처에 ‘굽이굽이 흐르는 시냇물'에서 유래한다. 1455년 프란치스코 사카르도 수사는 초기 프란치스코 성인과 동료 수사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썩어가고 있었던 오래된 오두막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경당을 수리하고 확장하였다. 프란치스코회 수도
고딕-움브로(Gotico-Umbro) 양식인 글라라 대성당에는 1206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에게 특별한 소명을 준 비잔틴 양식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12세기 중엽 아시시 출신의 작자 미상의 작품)이 있다. 이곳에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았던 글라라 성녀의 유품과 의복들이 보관되어있다. 원래 이곳에는 성 그레고리오
1568년 3월 15일 당대의 유명한 움브리아 출신 건축가 갈레아초 알레씨 (Galeazzo Alessi, 1512-1572년)는 교황 비오 5세 (Pio, 1566-1572년)의 부탁을 받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심장인 포르치운콜라를 품에 안은 마리아께 봉헌된 대성당 도면을 완성하였다. 1569년 3월 25일 기공식을 마치고 이듬해인 1570년 3월 12일
1569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은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지이다.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기원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들 중의 두 곳을 소중하게 품고 있다: ‘포르치운콜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 있어서 심장과 같은 징소이며, ‘통과 경당’은 성인이 죽음을 거쳐 천상 하느님께로 나아간 곳이다.
성지 역사 아시시 언덕과 평야 중턱에 자리한 다미아노 성지는 초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아시시 주교의 뜻에 따라 원래 의사이며 순교자인 다미아노 성인에게 7-11세기 중에 봉헌된 성당이다. 1205년 청년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접하고 불안해하다가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성 루피노 주교좌 대성당은 성 프란치스코와 성 글라라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성인은 설교하기 전에 이곳에서 기도하였다. 아직도 대성당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장엄하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정면 광장에서 성당을 바라보면 동물 위에 서있는 세 명의 남자에 의해 받들어진 대성당의 빛나는 장미형의 중앙 장식이 돋보인다. 시청 광장으로부터 성 루피노 길을 올라가면
남편 베드로와 제가 많은 성인들 중에서 유독 성 프란치스코 발자취를 따라가기로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시대에 우리를 포함한 한국교회가 세상의 징표로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가를 반성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난함을 마음과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갔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삶을 나침반으로 삼아 오늘 우리 일상을 살아가고자 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