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만이 그분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어떠한 분파주의도 없이마르코 복음서의 구절은 예수님께 가까운 그룹이, 비록 사회에서는 소외되었지만 그분을 따르고 있었던 사람들에 반대하는, 좀 더 넓은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다.(마르 9,33-37)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받은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9,38) 막아 보려고 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추종자들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러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면서 대면하게 되는 당대 권력가들의 적의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두 번째로 선언한다.누가 가장 위대한가?마르코는 사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제자됨의 요구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가장 자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복음사가다. 마르코는 말한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지막 도약을 하도록 돕기 위하여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9,33) 그러나 그 질문에
신앙은 일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 표현된다. 이것이 성경 메시지의 중심주제다.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누구인가?이 부분은 마르코 복음의 열쇠가 되는 부분이다. 장면은 이교도 땅으로 가는 길에서 벌어진다(카이사리아 필리피). 그리고 이후에 이어질 대화의 보편적인 영향을 암시한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먼저 접근하며, 그분에 대해 들었고 보았던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제자들에게 묻는다. 질문은 두 구절로 구성된다. 첫 번째,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관심이 있다.(마르 8,27) 바로 전에,
갈릴래아에서 온 떠돌이 설교가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사는 경계선을 넘어 이교도들의 땅에 기쁜 소식을 전한다.(마르 7,24.31)말 못하는 사람들의 혀가 노래할 것이다마르코 복음서의 윗 구절은 우리에게 쉽사리 비유적 차원의 해석을 허락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분에 관하여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꽤 타당하고 유익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의 이 구절들이 지니고 있는 본래 사실 그대로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태도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내용이 없는 셈이다.깨끗한 손들예수님과 바리사이파 간의 논쟁은 형식과 외형에 치중하는 종교와 하느님나라의 실제적이며 내적인 요구들을 놓고 벌어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종교 규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시작하고, 바리사이들은 그들이 백성들의 전통이라고 여기는 테두리 바깥으로 예수님을 쫓아내는 기회를 붙잡으려고 한다.(마르 7,1-5)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대변하는 참다운 전통 그 자체에 의존함으로써 그들에게 응답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위대한 예언
우리는 풍부하고도 긴 요한 복음 6장 읽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분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제시한 뒤, 주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반대가 일어날 것이고 결국 당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성령은 생명이시다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렵고 거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요한 6,60) 생명을 선포하기 위하여 치루어야 할 값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감히 그 사실을 주님께 직접 말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제자들도 목소리를 죽이고 그들의 두려움과 반대로 투덜댄다.(6,61) 그러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선물은 우리가 요즈음 주일에 읽고 있는 요한 복음서 6장 앞 구절들을 밝혀 주고 있다.회당에서 가르치기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빵의 주제로 되돌아가고 그분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제시하신다. 논쟁은 계속되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확장시킨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고 생명의 선물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분과 가까운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표현하는 징표와 일치되어야 하고 그분의 생명을 전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징표는 효과적인 징표이기 때문이다.(요한 6,51-53) 그리
오늘의 복음 말씀은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인간성에 관한 구절을 뽑아낸다.모든 사람은 제자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카파르나움의 담화-논쟁-는 계속된다.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드러내신다. 이 말씀은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는, 그래서 얻기에 매우 힘든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감히 크게 떠들지 않는다: “수군거리고, 불평하기 시작했다.”(요한 6,41) 그들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은 두려움과 끝까지 가고 싶지 않은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진지한 충실성을 요구하는 긴 과정이다.생명의 빵요한 복음의 6장은 빵의 기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의 깊은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요한이 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빵의 기적은 보다 더 보편적인 실제들을 가리키는 “징표”다.(요한 6,26) 주님의 행위는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을 표현한다. 오늘 복음의 전체 구절은 일의 주제에 초점을 둔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지만,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인정해 준 그분의 메시지의 전체성을
하느님의 말씀은 양분을 주는 빵이지만 빵은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하다.빵의 말씀예수님의 자세는 요한 복음에서 징표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징표란 그것이 나타내는 것보다 어떤 더 심오한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분의 자세는 많은 군중을 불러 모은다.(요한 6,1-2)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고, 그분은 군중들이 허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본다. 아마도 지나치게 상식의 차원에서 보면서, 필립보는 그들에게 빵 살 돈이 없다고 말한다. 이백 데나리온으로는(1데나리우스가 노동자의 1일 임금이다. 요한 6,7 참조) 충분치 않다
지난 주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을 제시했다. 이번 주일의 복음은 목자의 주제,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을 연구하고 있다.“땅의 가난한 사람들”과제의 한 단계를 완수한 다음, 제자들은 주님 주위에 모여 그들이 성취한 것에 대하여 평가해 본다.(마르 6,30) 예수님은 그들을 초대하여 엄격하고도 부드럽게 “잠시 쉬도록”(6,31) 한다. 너무나 많은 요구들 때문에, “그들은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6,31) 마르코는 항상 그런 상황에 주의가 깊다. 이럴 때 보여지는 주님의 단순함과 신중함은 우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매일이라는 기반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즉 현재의 전례력같이, 일상 안에서 사는 삶이다.돈이 아니라 사람들을 신뢰하기몇 장 전에, 마르코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뽑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마르 3,14) 했다고 말해 준다. 이제 그러한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고향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지만,(6,1) 그래서 이웃 마을들에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분은 제자들이 기쁜 소식을 선언하도록 파견함으로써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한다. “둘씩 짝지어”(6,7
우리들의 삶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한다. 오늘의 복음은 하느님께서 보낸 몇 사람들의 경우를 보여 준다.건방지고 고집 센 사람들하느님이 보낸 사람들은 그들이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에제 2,4)을 만날 것이나, 적어도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은 알게 될 것”이라는(2,5) 경고를 듣는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 이것이 히브리말 nabi의 의미인데, 우리는 “예언자”로 번역한다.예언자는 낡은 안
애덕은 나눔이라는 의미에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준다.익명으로부터 정체성의 회복으로회당의 지도자는 이름이 알려진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회그룹에 속하지만, 주님을 개별적으로 찾아간다. 그의 딸이 죽어가고,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딸을 낫게 해 달라고 청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야이로가 그분과 함께 간다는 구절을 읽는다.(마르 5,23-24)많은 군중이 또한 거기에 있다. 마르코는 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은 살아갈 때 부딪치는 역경과 곤란 앞에서 우리들의 기쁨과 용기의 원천이 된다.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용기마르코 복음서 4장은 이번 주일의 복음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하느님나라에 관한 많은 비유들로 이루어진다. 생명과 정의의 하느님나라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은총을 환영하고 하느님나라의 요구들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믿지 않고, 주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미묘한 길이 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미묘하다. 왜냐하면 거부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들은 하느님나라를 더 가까이 오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 노력하게 만드는 대조법들이다.주님께서 일하신다대조법은 어떤 알려지고 익숙한 것을 사용하여 포착하기 어려운 실제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와 같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예수님의 비유에 있어 큰 원천이다. 오늘 마르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들을 보면, 하느님나라를 농촌 언어로 표현한다. 첫 번째 비유는 흙의 힘과 풍부함을 농부의 노고와 대조시킨다. 농부들이 무엇을 하든, 자든 깨어 있든 간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난다.”(마르 4,27) 씨앗 안에는,
우리는 마르코 복음을 계속 읽고 있다.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나라의 우정과 선포라는 맥락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누가 미쳤는가?사람들이 너무나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므로 그분은 음식을 드실 시간도 없다.(마르 3,20) 자신들을 권위 있는 율법의 해석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세운 종교기관들을 예수님이 비난하자 그분의 친척들은 당황한다. 이 사람들은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이고, 혈육일 수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혼란스러운 가르침을 우려하며, 따르는 군중으로부터 그분을 떼어 놓으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미친 것 같다고 두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기념은 우리에게 경배의 중요성을 다루는 구약, 신약의 구절들을 제시해 준다.파스카의 배경제자들과 주님의 최후만찬은, 그때 성찬례가 설립되었는데, 과월절 축제 때에 마련된다.(마르 14,12.16) 과월은 억압과 불의의 땅인 이집트에서 자유와 공의의 땅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유대 백성들의 이 과월은 하느님의 해방하시는 참여 덕분에 가능했다. 이 역사적 사건이 이스라엘 신앙의 기반이 되었고 그 중요성은 영원히 믿는 이들에 의하여 새겨져야 했다. 이러한 새김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죄가 불의의 뿌리라는 것
오늘 대축일은 우리 신앙의 중심점을 상기시켜 준다.제자들을 만들기예수님이 그분의 사명을 수행하기로 선택한 갈릴래아에서부터,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0) 세례 주기 위하여 파견된다. 살아 계신 하느님이 선포되는데(신명 4,33) 지방으로부터, 예루살렘의 거만한 주민들이 멸시하는 땅에서 선포된다. 사명의 파견은 산 위에서 이루어지고, 산은 성경에서 중대한 계시가 일어나는 전통적인 장소다. 장면은 과장이 없다. 필요 없는 과장의 요소들이 없다. 단순하게 “그들이 예수님을 뵈었을 때, 엎드
성령 강림절에, 우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 안에 현존하는 성령을 기념한다.평화와 용서예수님의 죽음, 십자가 위의 처형은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 공포를 일으킨다. 모든 복음서는 이 사건들 후 나타난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네 복음 모두, 특히 요한 복음서가 우리에게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라고 말한다. 믿음을 갖는 것은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요한은 제자들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대신, 한 집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말한다.(요한 20,19) 그러자 주님이 나타나 그들에게 평화, 다시 말하자면 생명, 건강, 온